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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 가짜

불통

by 오순

꿈을 꾸었다.

눈을 뜨니 꿈을 꾸었고 여전히 꿈속에서의 갑갑함이 현실에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속에서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해 내려 애쓰고 있다.

기억하지 못하면 나중에 그 답답한 감정만이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닐 게 뻔하여서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세상이다.

정보시대에 전공자가 아닌데 주입된 지식으로만 전공자인 사람이 널려 있다.

그런 찐 가짜와 대화를 하다 보면 지식은 공유가 되는데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문화가 없어 소통이 잘 안 되는 답답함이 있다.


찐 가짜만 모르고 진짜만 느끼는 답답함이다.

불통이라 하기에는 지식이 있고 소통이라 하기에는 바탕이 없다.


가령 가까운 지인의 이야기이다. 집 마련하다 보니 생활이 척박해져 아이의 저금통을 쓸 일이 생긴 부모가 아이에게 집 사는 데 보태는 것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부모는 잊고 있었는데 아이가 집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서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맞다고 하기도 어려운 미묘한 상황이 발생해 난감했다. 아이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부모는 지분을 인정해 주었다 한다. 가짜 주인인 아이가 진짜 주인인 부모보다 더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젯밤 나를 답답하게 만든 그 사람도 아이와 비슷한 자부심을 가지려 애쓰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학교와는 별 상관이 없는 대학 캠퍼스 내 건물에서 하는 행사에 행사 진행 보조 봉사자로 지원해서 참여하러 왔다. 같이 이것저것 보조 일을 하는 데 그 사람이 수시로 그 대학의 역사를 말하였다.

새로운 정보라서 '아~ 아~그렇군요' 하면서 듣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여기 출신이세요?"

졸업한 학교 역사도 잘 모르는 내가 조금 민망하여 그 사람의 지식과 관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에 물었다.

아니라 한다.

그럼 뭐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가? 학교와 뭐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점점 그 사람의 말투와 분위기가 훈계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학교에 대한 지식을 섭렵하지 않고 면접 보러 온 신입에게 썰 푸는 학교 관계자처럼.

'이건 뭐지? 내가 젤 싫어하는 것인데. 골 아프네' 음 적당히 거리 둬야겠다.

대충 응답하고 다른 곳으로 슬그머니 이동했다.


넓은 듯 좁은 공간이고 보조 일도 비슷해서 이동해 보았자 이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부러 곁에 와서 말하는 게 보였다. 태도는 여전히 내가 싫어하는 훈계적 태도이어서 신경이 조금씩 거슬려갔다.


찾아보면 세상이 다 아는 정리된 지식을 자기만의 것인 양 암기하듯 읊어대는 것이 짜증 난다. 자신의 주관이 없는 것을 자기만의 특별한 주관인양 하는 가면이 싫은 것이다. 그냥 '~이렇다 하네'와 자기 것을 너에게만 특별히 전하니 자기를 올려다보게 스스로 고개를 높이 쳐들고 있는 것은 참 거북하다.


될 수 있으면 궁금한 것은 책에서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지 사람에게 특히 선생에게 묻지 않는다. 꼭 수직적으로 서열을 세우려는 태도가 혐오스러워서이다. 수직적 태도는 대화 자체를 할 수 없어 답답하다. 일방적인 말을 멈출지 모르고 쏟아내면서 대화라 착각하는 그 태도를 저지하기가 곤란하다. 피하는 게 상책이다.


봉사를 마치고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어서 동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지사 피할 수 없으면 내가 주도해 보자 하는 맘으로 질문을 했다.

이십여 년 가까이 오랫동안 다문화 가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긴 물어봐주길 간절히 원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게 자기 이야기만 한다.

그것도 앞뒤 맥락 없이 하고 싶은 부분만 이야기한다.


아무튼 '음~ 그래서 가르치려 드는 직업병이 나에게 뻗힌 것이구먼'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으니 용서하자.

싫은 것은 싫은 것이라 더 이상은 용납하고 싶지 않다.


그런 답답함이 남아 있어 꿈에 연출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제하지 못하고 가해자에게 위해까지가 하며 반항을 했는데 사과는커녕 위해 한 나만 나쁜 사람이 되어 속이 터질 것 같은 꿈이었다.


아마도 꿈속에서는 사과받고 이해받고 소통하고 싶어 발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소하지만 불통이 되고 오해받고 있으면 털어내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다.


혐오나 배타를 은따처럼 은근히 퍼뜨리는 그에게 자신도 은따처럼 은근하게 기교 있게 항의하지 못해서 자신의 항의만이 두드러져 이상하게 혼자 뒤 툴리는 꿈속의 상황이라고 할까.


모파상의 [노끈]이라는 단편소설의 내용이 그러하다.

어쩌면 그 답답한 상황을 그리도 객관적으로 표현했던지 이것이 작가 능력이구나 감탄했었다.

노끈~ 그 노끈 하면서 죽어간 주인공 마냥 설명하고자 하나 아무도 듣지 않는 그 답답함이 나의 꿈이었다.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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