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마비 그리고 좌절과 부채감
1980년대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어두운 시대였다. 고등학교 2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이 도망치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신고하라고 하였다. 도둑이나 간첩 등 나쁜 사람이면 당연히 신고해야 되겠지만, 왜 신고해야 되는지 납득할만한 설명은 없었다. 그냥 분위기상 엄청 무시무시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시골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인터넷도 없었기에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교 후 집으로 걸어가는데 얼마 못 가서 한 남자(아마 대학생이었던 것 같다)가 거의 지친 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길을 건너 밭을 무질러 야산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선생님이 말한 그런 종류의 신고해야 할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신고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 사람이 빨리 산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렇게 한참을 그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내 길을 걸었다. 그 사람은 그냥 모르는 이웃의 그저 그런 오빠 정도로 보였다.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신발을 제대로 신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도와주기는커녕 그 사람이 빨리 도망치기만을 바랬다.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전혀 몰랐다. 만일 그때 그 사람이 돌아서서 도와 달라 했다면 내가 도망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항상 그 사람이 생각났다. 뚜렷한 인상은 떠오르지 않고 대략적으로 그때 그날 그 자리와 함께 실루엣으로 생각나곤 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 보니 광주 민주화 운동(내가 학교 다니고 졸업해서 한참 뒤까지 광주사태였다)으로 도망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독재정권은 모든 언론을 장악해서 국민들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막았다. 본인들이 구체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그때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고 좋지 않은 검은 안갯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신고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2학년쯤 학생들끼리의 입소문으로 천주교 성당에서 틀어주는 외국인이 찍었다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너무나 참혹하였다. 세상이 이렇게 뒤집혀도 되나 싶고 무서워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어서 죽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을 무참히 죽인 사람들에 대한 공포만 그득했다. 그 뒤로 제복만 보면 난 경직되었다.
자연사란 죽음도 충격인데 강제로 저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그들의 얼굴이 가면처럼 보였다.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나의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난 그 공포에서 벗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뒤로는 죽은 이들에 대한 부채감이 나를 짓눌렀다. 나 자신이 남한테 함부로 짓밟힌다는 자체가 너무 무서워서 난 감히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권에 들어가 피 흘리고 싶지 않았다. 바위에 계란 던지듯 자신을 던져 버리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이 선배들이 후배들이 그렇게 계란처럼 터지는데도 참여를 못했다. 아니 외면하고 피했다. 뒤로 물러서서 무책임과 무력감에 젖어 허깨비마냥 있었다. 공부가 물론 될 리도 없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항의할 용기도 없고 불의 속에 이득을 취할 뻔뻔함도 없는 그렇다고 다소곳이 길들여지듯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자신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살아 있으나 빈껍데기 쓰레기 같았다. 무서워 꼼짝 못 하는 내가 싫었다. 그렇다고 용감하게 나서고 싶은 의지도 의미도 없었다. 비루한 내가 부끄러워 어디에 소속도 못하고 혼자서 떠돌았다. 지금은 이렇게라도 나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때는 공포 그 자체에 마비되어 내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괴로워했다. 너무나 많은 희생과 아픔이 있기에 감히 괴롭다는 표현은 하지 못했다.
그 뒤 내 형제 내 가족이 당한 듯 가슴이 너무 아파서 이해하려 들지 않는 이에게 내가 보게 되고 알게 된 그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하다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느 모임에서인가 아는 지인이 죽을 만해서 죽은 것 아니냐며 무심히 툭 던지는 그 말에 저 무지함이 또 그들을 그렇게 다시 죽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그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중에 긴 유학생활을 하다 온 지인이 그 상황을 물은 적이 있다. 간략하게 설명하는데도 눈물이 앞을 가려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때의 그 분위기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것은 역사일 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눈물에 이해는 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그 지인을 보면서 그때의 그 가슴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기록으로만 남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나는 유관순 누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군에 잡혀간 가녀린 여학생을 그들은 마구잡이로 고문하고 망가뜨린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가슴이 아파서 삼일절마다 나오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곡조를 따라 불렀었다. 기록에 따라 그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 없다.
기존의 것이 잘못되었음을 항의하고 고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과정인지 이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안다. 특히나 권력이 있는 곳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앞장서서 뛰지는 못할지언정 그들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가슴으로 기억하고 새겨본다.
모든 불의에 앞장서 항의하고 희생한 모든 이들을 역사의 기록이 아닌 사람으로 가슴 깊이 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