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해!

믹스커피

by 오순

아침부터 흐릿하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싸리 눈이다. 싸르락 싸르락 조용히 내리고 있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것도 믹스 커피를 진하게 타서 마시고 싶다. 1980년대에 믹스커피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저렴하고 달달하면서 커피 향도 그윽해서 주머니가 빈약한 노동자나 학생들에게는 특히나 일품이었던 것 중 하나이다. 그 당시 일명 '자판기'라 불리는 자동판매기 커피가 인기였다. 기계 주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종이컵이 나오고 거기에 뜨거운 물과 커피가루와 설탕 프림이 나와 살짝 흔들어 마시면 되었다. 간편하게 마실 수 있고 맛도 좋아서 그 맛에 중독된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무로 만드는 종이컵을 너무 많이 사용해 환경보호상 종이컵을 자제하라 캠페인이 일어날 정도였다. 요즘은 커피판매점이 많이 생기고 저렴한 곳도 많고 '아메리카노'라는 블랙커피가 유행된 지 한참이라서 자판기도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렇게 맛에 길들여진 믹스커피는 오랜 세월 내 곁에 머물렀다. 오랫동안 마시다 보니 믹스커피에 중독되어 하루에 5~6잔을 마시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앉아서만 일을 하다 보니 믹스커피의 설탕과 프림이 배에 누적되어 뱃살이 두둑해지는 게 느껴졌다. 건강상 믹스커피를 끓고 생강차와 아메리카노 커피로 대치했다. 그러나 그러한 블랙커피나 생강차가 믹스커피 달달함의 깊이를 대치해 주지는 못했다.


가끔 믹스커피에 대한 향수가 진해질 때면 마트에 가서 일회용 커피를 사다 마시곤 한다. 오늘도 그런 날 중의 하나이다. 눈이 내리고 있으니 두터운 롱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쓰고 우산을 쓰고 나왔다. 밖으로 나왔으니 일단 산책부터 해야겠다. 눈 내리는 공원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하니 좋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눈을 치울 시간이 없었나 곳곳에 눈이 쌓여 있어 더욱 운치 있었다. 도심에서는 눈이 쌓이기 전에 치우는 바람에 쌓인 눈 보기가 어렵다. 오랜만에 쌓인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는 기분이 좋았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몸이 꿈틀대며 가벼워졌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우산 위로 싸륵싸륵 눈 내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눈 내리는 소리와 눈이 쌓여가는 풍경이 소란한 세상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눈으로만 보고 끝내기에는 금방 잊어버리는 내 습성 상 아쉬워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진을 보면 그날이 생각나고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조금은 기억나는 것이 있어서 사진을 보는 즐거움이 생겼다. 그래서 멋진 사진은 아니지만 내가 갔던 곳이나 재미있는 것들을 사진 찍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공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니 운동화 가장자리가 내 체온으로 운동화에 묻은 눈이 녹아 발가락 쪽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마트에 가서 믹스커피 한 통을 사 왔다. 집에 와 물을 끓여 커피를 타니 애완 고양이 하얌이가 스르륵 나타나 야옹거린다. 커피를 타서 베란다로 나가 한 손으로는 고양이 등을 쓰담쓰담해주고 한 손으로는 커피를 마셨다. 으~ 무지 달달하구먼! 오랜만에 마시는 믹스커피는 생각보다 커피 향은 덜하고 많이 달았다. 내 머릿속 믹스커피 향을 생각하면서 그냥 마셨다.


하얌이는 스킨십을 엄청 좋아한다. 귀찮을 정도로 거의 하루 종일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그래도 쓰다듬어 줄 때마다 만족해하는 것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얌이 녀석은 스킨십에 중독된 것 같다. 난 믹스커피에 중독되었던 향을 생각하면서 한 잔 마시니 하얌이와 나 둘 다 대만족이다.


베란다 밖 지붕에서 고드름이 보인다. 입춘이 지난 마지막 추위라 하니 아마도 눈과 고드름은 내년까지 기다려야 할 풍경이 될 것이다.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천세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