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의 선거

관리 감독할 책임

by 오순


여성의 선거권은 남성과 같이 처음부터 부여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여성의 선거권 역사를 살펴보면 근대의 여성 선거권은 프랑스혁명 당시 여성의 선거권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여러 나라에서 제한적으로 여성의 선거권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1893년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캐나다와 소비에트 러시아, 독일, 폴란드에서도 여성 선거권이 주어졌다.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노르웨이는 1913년에, 덴마크는 1915년에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1919년에 네덜란드, 1920년에 미국, 터키에서는 1926년 여성 선거권이 주어졌다. 영국에서는 1928년에 21세 이상의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우리나라는 1948년 해방 이후 실시된 첫 선거부터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가장 최근에서야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나라는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남성들이 당연히 부여받는 선거권을 여성들은 오랜 시간을 거쳐 투쟁 속에서 쟁취하였고 어느 나라에서는 최근까지도 얻어내고 있는 중이다. 가부장 사회의 역사 속에서 여성은 남성에 소속된 부속물로 간주되어 선택권이 없었다. 선거권이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인 참정권을 말한다. 남성의 전유물인양 그들의 독점 속에서 어렵게 투쟁하여 얻어낸 것이 여성의 선거권이라 할 수 있다.


팔순 노모에게도 선거권이 있다. 한 번은 어머니의 선택이 궁금하여 어떤 후보를 뽑을 것인지 물어보았다. 정당도 많고 후보도 많고 정보 전단지도 많아서 젊은 나도 제대로 된 정보를 인식하거나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노모는 나의 질문에 의외로 간단하게 후보 한 명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였다. 나는 노모에게 왜 그 후보를 선택했는지 물었다. 외아들이 그 사람이 제일 괜찮다고 낫다고 해서 선택한 것이라 하였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해야지 아들이 옳다고 하면 다 옳은 것이냐, 그렇게 무조건 아들 의견을 따라가면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선조들이 얼마나 힘들게 투쟁하여 얻은 선거권인데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느냐, 확실한 판단의 근거 없이 선택하면 안 된다, 아무리 자유주의 국민이라 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면 안 된다, 선거에는 후보자나 유권자나 둘 다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등등 내가 하도 구시렁대니 노모가 나름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노모가 선택하는 후보가 없는 집에 태어나서 고생 고생하며 대기업 사장까지 되고 성공했으니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경제를 더 잘 살릴 것이라고 한다. 아마 노모의 이 의견도 외아들의 생각일 것이다. 노모는 종교도 아들을 하느님 삼아 다니고 기도도 아들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이다. 아니 그 후보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성공하고 사장이 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양보해서 다른 공공이익을 위해서 그리했는지 알아보았느냐, 대통령 되어서 경제를 살릴 인물일지 말아먹을 인물일지 판단할 근거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속담에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백 섬을 채우려 한다는 말이 괜히 있겠느냐, 재산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재산에 대한 욕심이 더욱더 크게 생기는 것을 살면서 보지 않았느냐며 노모를 몰아붙였다.


내가 어렸을 때도 어머니는 정치한다고 선거에 매번 나와 처음에 한 번 붙고 계속 떨어져 물려받은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월세 단칸방에 힘들게 살고 있다며 한 번만 밀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후보자가 불쌍하다고 뽑아주지 않았느냐, 나중에 얼마 되지 않아 그 후보자가 부정부패에 휘말려 교도소 가지 않았느냐며 선거를 동정심이나 감정으로 하면 안 된다고 다그쳤다. 선거권에 대해 노모를 몰아붙이고 다그친 내 말들은 사실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매스컴에 나오는 정치인들 대부분이 국민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안위나 명성만을 위해서 서로의 인성을 무지스럽게 깎아내리며 유치한 자존심 대결과 막말하며 싸우는 모습이 깡패보다 더 그악스러워 보였다. 그런 그들을 우리 국민들이 뽑아주었다는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선거 때마다 혹여 이 후보가 아니면 저 후보가 더 나을까 기대해 보지만 역시나 도찐개찐이었고 계속되는 실망 속에서 정치에 관심이 점점 떨어지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투표하거나 기권하거나 하였다. 이런 나의 정치에 대한 실망과 선거에 대한 무관심들이 내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선거권의 역사를 살펴보니 그 선거권을 얻기 위해 투쟁했던 선배들의 노력을 나 같은 무책임한 방관자 후배들이 말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선택하여 최선이 되도록 격려하고 지켜볼 책임이 선거권자들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투표만 하고 그 뒤는 알아서 하겠지 하고 방관하면 민주주의는 지켜낼 수 없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특히나 내가 우리가 선택한 후보자들이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관리 감독하는 것이 진정한 선거권의 행사이었다.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선거권을 행사해야겠다는 생각에 노모를 좀 다그쳤던 것이다. 선거가 끝나 후 한참 뒤 누구를 선택했는지 다시 물어보니 노모는 변함없이 외아들 따라 그 후보에게 투표를 했다 한다. 난 한동안 두고두고 노모 책임이라며 반농조의 질책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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