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외국어
언젠가 호숫가를 걷고 있는데 뒤에서 ‘플리스~ 익스큐스 미!’ 하는 소리가 들려 옆으로 비켜 주었다. 그러자 ‘땡큐!’하면서 뒤에 있던 사람이 내 앞으로 가고 있었다. ‘댓쏠라잍!’하고 보니 외국인이 달리기 운동을 하면서 나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난 그 말을 한국어처럼 듣고 한국어 하듯이 무심결에 대답한 것이다. 달리는 외국인을 보면서 내가 영어를 알아듣고 영어로 자연스럽게 대답한 것이 너무 신통방통해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귀가 열린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귀가 열려야 말문이 트인다는 데 딱 그 모양새이다.
외국인만 모면 영어로 물어볼까 봐 얼음땡이 되었는데 안 보니 들리는구나. 비록 아주 단순하고 쉬운 말들이었지만 영어로 귀와 입이 열리고 트였다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시력과 청력까지 상실한 헬런 켈러가 처음 터득한 단어가 ‘워러(water)’이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그저 기호로만 익혔던 것들이 처음으로 의미를 알게 된 그 기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헬렌 켈러만큼은 아니었어도 오랫동안 공부한 영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무능함까지 이어졌는데 그 답답함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요즈음 원서를 한 권 마스터해보자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책 영어 원서를 한두 문장씩 베껴 쓰고 읽기를 반복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 등 영어권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언어를 새로 배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영어 하나에 우리가 투자하는 시간이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대화하거나 글짓기를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투자했던 그 많은 시간들 속에 도대체 무엇을 하였기에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쓰는 바보가 된 것일까. 결과적으로 보면 너무 비효율적이라 허무하기 그지없다.
세종대왕께서 우리의 한글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또 우리가 말하는 것과 중국어로 말하는 것이 다르니 배운 중국어로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의 영어를 배우는 과정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을 것이 뻔하다. 먹고살기 바빠 그 공부마저 못한 문맹인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신 것이다. 우리의 한글이 없었다면 국가나 민족에 대한 자부심도 없고 뿌리도 없이 남의 나라 글과 문화에 기생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어려운 남의 글을 배우지 못해 이들이 많아 문맹국이 되었을 것이고 말이 독립국이지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조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유산이며 창조물이다.
문자나 언어의 기원을 정확하게 밝히기가 어렵다 한다. 그러나 우리의 한글은 정확한 기원이 있고 창조자도 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당연한 듯 배우고 익힌 우리말과 글을 선진국이 아니어서 세계 속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 선진국 특히 미국 같은 강대국의 언어인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정해졌으니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제2의 국어처럼 영어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선진국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 이중 언어 습득 때문에 겪는 고통을 모를 것이다.
제2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투자한 시간들을 다른 것에 투자했다면 두 배 세 배 효과를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영어로 번역하려면 제대로 그 느낌을 살릴 수 없다. 번역본을 보다가 원서를 보니 느낌이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그 문장이 나오게 된 뿌리 깊은 문화배경을 알 수 없다면 겉핥기 식의 이해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원서를 읽어 봐야 되고 원서를 읽기 위해서는 제2외국어를 습득해야 되는 것이다.
영어 같은 경우는 영어권이라 하여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 등등은 알파벳 문자로 시작되어 어원이 비슷하고 단어 구성과 문장 구성도 비슷해서 영어가 모국어라면 영어권의 제2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우리보다는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한글은 영어와는 문장 구조도 다르고 문자 구조도 다르고 발음도 완전히 다른 모국어를 가지고 있어서 전혀 다른 제2외국어를 습득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시작부터 너무 뒤떨어져 있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시로 반복하여 말하고 들어야 말문이 트이는데 배운 외국어를 평소에 사용할 일이 극히 드물다. 아무리 공들여 영어회화를 공부해도 그때만 효과가 있을 뿐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게 되니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긴 시간 투자해 공부했어도 장롱면허처럼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내 생애 원서 한 권이라도 읽어내야 영어에 투자한 내 시간들이 덜 억울할 것 같아서 핸드폰으로 모르는 단어를 찾아 발음해가며 하루 두세 문장씩 읽고 있다. 노력하면 그래도 읽을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내가 말하는 영어가 내가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이 영어로 말하는 소리도 들리고 이해가 된다 하니 소리 내어 반복해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