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이해해 주라
성격이 비슷하면 호감을 가지다가 차츰 설명하지 않아도 반 이상은 이해가 되는 편함을 느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상대가 자신보다 자기를 더 잘 알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상대방을 막 대하게 된다. 상대가 좀 힘들어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유롭게 행동한다. 막대할 나쁜 의도는 없었으니 죄책감도 없다. 단지 너그럽게 이해만 해 주면 되는 데 그러지 못하고 따지는 상대에게 되레 쪼잔하다고 쏘아붙인다.
이런 상황이 특히 가족 내에서 벌어졌을 때는 어디서 어디까지 한계를 그어야 할지 대혼란이 온다. 고성이 오가고 눈물이 쏟아지는 뒤죽박죽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전쟁 후 반성과 화해의 배려 없이는 상처가 아물지 못할 정도이다. 가족 내에 서열이 높은 특히 부모의 눈높이를 맞춘 사과가 있어야 한다. 이런 진정성 있는 윗사람의 사과가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변명과 설교로 얼버무린다.
어젯밤 딸과 한바탕 전쟁을 했다. 별것 아닌 일이라면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서로에게 바라는 감정이 섞이다 보니 격하게 변해 버렸다. 감정만 앞세우고 이해만 바라다보니 괘씸하고 서운한 감정들이 뒤섞였고 막말까지 내뱉는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감정이 너무 격하다 보니 이성적으로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다음날 딸은 마음을 풀지 않고 선약이 있어 외출을 했다. 집에 혼자 남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딸이 괘씸하다가 독단적인 내가 미안해지기도 하였다. 따박따박 따지는 자식이 다 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논리로만 밀어붙이니 오히려 감정이 치솟았다.
딸에게 미안하다고는 했다. 사실 반만 미안하고 반은 사과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직 딸에게 사과받지 못했다. 이런 내 감정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내 감정 속에 다른 뭔가가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하는데 귀찮기만 하였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또 누군가와 부딪칠 때 그것이 뒤섞여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 것 같은데 쉬이 나와 주지 않았다.
편할수록 친할수록 예의를 갖추라 했다.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 자체가 잘못이다. 이 잘못만 인정하면 되는데 자꾸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상대방의 잘못도 찾아내어 인정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것이 범인이었다. 내가 사과했으니 내 할 일은 다 끝난 듯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데 상대방 반응이 없으니 끝이 난 것 같지 않고 뭔가가 남아 있는 듯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탓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남도 속이지만 자기 자신을 제일 잘 속인다고 한다. 자기 자신도 모를 만큼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기가 범인인 것만 알아도 모든 문제는 거의 해결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사과했으면 되는 것이다. 거기까지이다.
나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니 이제야 개운하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했다. 나는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매번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으려 헤매다 범인이 나 자신임을 제일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어른이라는 체면을 세우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다. 아마도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이런 욕망 때문에 어른들은 머릿속이 항상 복잡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