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출퇴근하는 시간대에 사람들과 역방향인지 항상 지하철 안은 여유로워 거의 앉아 갈 수 있어 통근거리가 멀어도 조금은 견딜 수가 있었다. 오늘도 퇴근하는 데 역시나 자리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급속으로 밀려오는 피로 때문에 눈을 감고 반쯤 졸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반복적인 톤으로 들려온다. 보통 웬만한 소리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흘려보내는데 이 소리는 내 귀가 걸러내지 못하였다. 내 귀의 레이더에 걸리니 무슨 소리인가 궁금해져서 소리 나는 방향으로 신경이 가고 있었다.
‘으~ 피곤해 죽겠는데 누가 예의 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겨!’하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구태여 누군지 살피기도 귀찮아서 그대로 참고 가려하니 점점 더 많이 들렸다. 결국 못 참고 주인공을 찾아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이고 목을 쑤욱 빼서 보았다. 노약자석에서 어떤 어르신이 내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정신이 혼미한 사람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줄 알았다. 좀 더 살펴보니 전화기에 대고 하는 말이었다. 술을 많이 하신 듯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전혀 신경을 못 쓸 정도로 감각이 둔해져 있는 듯했다.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 ~ … 여보세요 … 저는 그래요 ~ …저는요 ~ 변하지 않는 사람이예요 …… 여보세요. 저는 ~ 제가~ 어쩌고저쩌고 …… ”등등 그 어르신의 말투이다.
틀니를 낀 듯 합죽이 소리가 깔려 나오는 목소리이다. ‘제가’ 혹은 ‘저는’과 같은 반복적인 말투로 시작하며 겸손한 척 하지만 결국 자기 잘난 체다. 자신만을 중요시하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고집스러운 말투들이었다. 그런 말들이 반복적으로 들리니 신경질이 났다. 차라리 솔직한 말들이었으면 거슬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 대화가 아닌 혼자 말처럼 계속 말하니 듣고 있는 그 노인의 전화기 너머에 상대방도 지겨웠을 것 같다. ‘여보세요’를 반복적으로 말하며 상대방을 불러대는 것을 보니 보이지는 않아도 느껴진다.
그 사람은 술 깨고 나서 기억할까? 그날 대중교통인 지하철에서 진상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까? 모를 것 같다. 만취한 것도 아닌데 저러는 것을 보면 일상이 저럴 것 같다. 정신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지만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자기가 보여주는 인격은 신경도 안 쓰면서 자기가 되고 싶은 인격은 아주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말로 인격을 설명한다고 그 인격이 자기 것이 될까?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인격이 손상되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억지로 참느라 애쓰느니 차라리 이리저리 비판해 보는 것도 괜찮았다. 그 진상 노인 때문에 졸지에 희생타가 되어 화를 참는 것보다 제삼자가 되어 구경하듯 관람하고 분석해 보았다.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로 일정 거리가 떨어지니 조금은 견딜만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렇게 거리 두기를 하고 살펴보면 훨씬 부담이 덜하고 해결하기도 수월해진다. 아무튼 술이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진상은 본래 진상인 것이다. 술이 진상을 만들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