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까지 보낸 고향집은 세 번 변신했다. 초가집, 기와집, 양옥집이다. 내 기억 속 가장 따뜻하게 남아 있는 집은 초가집이다. 가난했지만 풋풋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유년기는 초가집, 초등학교 6년은 기와집에서 살았다. 국도에서 보이는 우리 동네는 새마을운동으로 똑같은 모양으로 집을 새로 지으라고 정부에서 융자를 해줬다. 엄마는 나중에 나랏돈에 대해 “나무 위에 올라가게 한 뒤, 흔들어버린 것과 같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자가 그만큼 비쌌다는 얘기다.
안방에는 이불을 얻어놓던 시렁이 있었다. 그 시렁은 한 철은 사각사각 뽕잎을 먹던 누에에게 내줘야 했다. 옷장이 없어 방 아랫목에 옷을 걸어두고 가리개로 덮었다. 안방에서 문지방만 넘으면 작은방이 있었다. 작은방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소마굿간에 누렁소가 있었다. 누렁소는 이따금 송아지를 낳아주어 생활 밑천이 되었다.
안방에서 앞쪽으로 문을 열고 나오면 토방이 있었다. 안방 옆으로 딸린 부엌에는 불쏘시개 나무가 있던 자리 바닥에는 토굴이 있었다. 가을에 들판에서 수확한 고구마, 무를 그곳에 넣어두었다.
먹거리 없던 시절, 생고구마와 무는 간식거리였다. 만화책을 보다가 배가 고프거나. 사랑방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배가 고프면, 토굴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가 고구마와 무를 꺼내와 깎아 먹었다. 농한기인 겨울에는 어른들과 민화투를 치면서 같이 먹기도 했다. 그 맛은 초가집 처마에 기다랗게 달린 고드름보다 더 시원하고 맛났다.
고구마와 무를 밥으로도 먹었다. 쌀보리가 넉넉지 않던 시절, 고구마와 무는 고구마밥, 무밥으로 둔갑했다. 고구마는 통째로 밥 위에 놓여 있었다. 밥과 같이 익혀진 고구마를 손에 들고, 뜨거워서 호호 불면서 고구마에 붙어 있는 밥알을 뜯어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숟가락으로 눌러 잘라 고구마만 먹거나, 작게 잘라진 고구마는 밥과 함께 먹기도 했다. 고구마밥은 달짝지근했다.
무는 채를 썰어 밥 속에 섞여 있었다. 도마 위에 놓인 무는 커다란 부엌칼로 ‘싹싹싹, 싹싹싹’ 리듬 있게 소리를 내며 무채가 된다. 너무 얇게 썰면 물이 나오므로 무밥에 들어갈 무는 적당한 두께로 썰어야 한다. 엄마는 한석봉 어머니처럼 척척 칼질 하며 무채를 만들었다. 무밥은 심심했다. 심심한 무밥에 간장과 참기름을 친 후 비벼 먹어야 일품이었다. 거기다 엄마가 20여 길을 걸어와 잡아 온 게장을 얹어 먹으면 순식간에 밥 한 그릇이 뚝딱 비워졌다.
가난했지만 밥과 함께 늘 딸린 국물이 있었다. 국은 엄마가 이십여 길을 걸어가 직접 잡아 온 맛으로 만들어진 맛 국이었다. 지금은 그 흔했던 맛은 보기조차 힘들고, 게장 정식은 비싼 밥상으로 차려진다.
고구마밥과 무밥은 가난했던 시절 양식을 대용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웰빙 음식이 있을까 싶다. 게다가 엄마의 사랑까지 듬뿍 얹어졌으니. 내가 여태 건강한 이유는 가난이 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