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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순자 Nov 29. 2023

땅속의 고구마를 캐기 시작한 11월

내가 여든을 넘은 어르신에 대해 얘기를 들은 것은 2022년 9월 말이었다. 공명재를 찾은 분이 남편과 같은 고향인 어르신이 포천 가까운 연천에 살고 있다고 했다. 1년 후 지난 9월 중순 평화워크숍에서 그분을 만났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남북문제 등을 다루는 워크숍이었다. 10여 명이 2박 3일 일정으로 세미나, 식사를 겸한 향연 등으로 진행되었다. 남편과는 고향 선후배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10월 중순 지나 나에게 연락이 왔다. 전화번호는 워크숍을 개최한 곳에서 알아봤다고 한다. 이름을 밝히고 10월 말 ‘선한 이웃’들을 초대해 점심을 하고 싶단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초대받은 하루 전날 공명재에서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전하고 초대했다. 그 모임에 어르신이 직접 만든 배 효소 한 병을 들고 부인과 찾아왔다. 서울에서 일정이 있어 식사를 못 하고 가신다기에 행사를 위해 준비한 떡, 홍어, 돼지고기 등을 싸 드렸다. 또 내가 편저한 마을 어르신 생애사 <세월 따라 흐르는 인생 이야기>를 드렸고, 졸저 <인터뷰 사례 중심, 상호주의 관점 다문화 이해와 실제>는 직접 챙기셨다.




다음 날 점심 약속에 댁으로 찾아갔다. 같이 나눠 먹을 떡과 다문화에 관심이 있으신 듯해서 공저 <일본의 세계시민교육>을 갖다 드렸다. 그 어르신을 소개한 목사님과 일행, 내가 사는 마을 이웃에 사는 좋은 분이 오셨다. 부인이 직접 만든 음식이 가득 차려 있었다. 식사와 담소를 나눈 후 그분이 사는 곳과 텃밭 등을 둘러보았다. 가만히 부인이 내 귀에 대고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야.”라고 했다. 마음이 짠했다. 그냥 갈 수 없어, 남편과 남아 온 동네 사람들에게 늘 베풀며 사셨다는 그분의 어머니 얘기를 듣고, 산길을 넘어 빨갛게 물든 단풍을 구경하며 귀가했다.




이후 11월 중순 독일 통일에 관한 평화워크숍에서 그 어르신을 다시 만났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서울 모 교회에서 어르신 합창단 무대에 선다고 했다. 남편과 함께 가기로 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내 일정을 마치고, 남편을 만나 점심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장미꽃 한 다발을 사서 오후 6시에 있는 합창단 행사장을 찾았다. 부인이 와 계셨다. 부인도 점심때 결혼식장을 찾은 뒤 사람 구경하며 보냈다고 한다.




평균 나이 78세의 30여 명으로 꾸려진 어르신 합창은 감동적이었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단을 보니 학창 시절 내 강사이자, 내가 강사로 나간 대학에서 총장으로 만난 분도 어느덧 나이가 들어 그 자리에 있었다. 행사 후 어르신을 만나 꽃다발을 드리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주최 측에서 제공한 간단한 저녁을 먹고 우리 차로 어르신 차가 있는 연천 월정리역까지 모셔다드렸다. 약 두 시간 오는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직도 생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누구나 와서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싶다고도 했다. 




이후 그분이 가장 존경한다는 원로 교수를 모신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나도 그날은 빠질 수 없는 대학 친구들 부부 동반 때늦은 가든파티가 있어 초대에 응하지 못했다. 나는 대학 친구들 모임에 가서 지금 잘 나가는 아이돌 부모를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듣는 기회를 얻었다. 어르신은 존경한다는 분의 글을 문자로 보내줬다. 




왜, 그분은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실까? 남편과 동향이라는 것도 있을지 모르나, 무엇보다 지향점이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인적 자산과 경험을 후대를 위해 남겨주는 삶이다.




나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나이가 짧아졌다. 인생의 계절은 열매를 거둘 가을이다. 우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을 후대를 위해 책으로 하나씩 묶어낼 생각이다. 아직은 줄기만 보이고 고구마는 땅속에 묻혀 있다. 10월에 환갑을 맞아, 대학 강의는 그대로 하나 사회적 활동 중 하나는 은퇴했다. 그 때문에 11월을 고구마를 캐기 시작한 달로 여기기로 했다. 천천히 하나씩 캐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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