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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중리 이주마을 이야기

by 최순자

부모교육 & 교사교육 전문가 雲山 최순자. 한탄강 중리 이주마을 이야기. 국제아동발달교육연구원 공명재학당. 2025. 1. 1.


2016년에 건설 완료된 한탄강 홍수조절 댐 건설로 인해 한탄강 포천 권역에 대단위 홍수조절지(160만 평)와 대규모 주민 이주(289세대)가 발생했다. 특히 이주 주민 중 가장 큰 범위는 관인면 중리 옛 교동마을, 옛 신흥동(본동)에서 155세대가 이주했다.


양문 등 밖으로 더 많이 이주했고, 새로 형성된 마을이 ‘교동장독대마을’, ‘신교동마을’과 ‘지장산마을’이다. 이중 ‘신교동마을’은 이주민뿐 아니라 외부인이 같이 산다. 나도 제자와의 인연으로 산세에 반해 이 마을에 온 지 3년이 됐다.


포천시 관광과 소속 한탄강세계지질센터에서 기획, 내가 이주민 인터뷰, 자료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했다. 그 결과 나온 책이 <한탄강 중리 이주마을 이야기>이다. 이 책을 바탕으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고, 기획전시 중이다.


책에는 구술 내용을 가능하면 그대로 싣고, 수집한 사진, 문서, 생활도구 사진도 분류 작업을 하되 가공 없이 싣고자 했다. 이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자료를 통해 그분들의 삶과 마을 특성을 알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이주민 구술 내용은 때로는 미소 짓게 했고, 때로는 안타까웠다. 연구조사자가 느낀 감정을 책을 읽는 분들이 공명(共鳴)한다면 보람이겠다.


책 구성은 첫째, 마을 개요를 앞부분에 읽기 쉽게 개조식으로 소개했다. 둘째, 인터뷰 내용은 인터뷰에 응해 주신 분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제목과 장면마다 한눈에 읽을 수 있도록 소제목을 붙였다. 셋째, 사진, 문서, 생활사 자료를 부록에 게재했다.


연구조사 대상지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었고,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마을이었다. 인터뷰에 응한 1930년~1970년대에 태어난 23명의 이주민은 화전을 일구며 나무해서 먹고살고, 위험을 무릅쓰고 광산 일도 하며 살아왔다. 또 누에도 키우고, 버섯재배도 해 보고, 소도 키우면서 목돈을 마련하고자 했고, 품팔이를 했으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형편이 여의찮아 외지로 돈 벌러 갔다가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마을의 청년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자발적 모임을 만들고 퇴비 증산 운동, 김매기, 구판장 운영 등을 했고, 마을의 각종 행사를 도맡아 했다. 대대로 이어 온 정신적 가치를 지닌 민속문화는 살아 있었다. 설날 세배 다니기, 정월 대보름 횃불놀이, 단오 머리 감기, 여름 대동천렵, 체육대회, 추석 콩쿨대회, 겨울 척사대회 등을 개최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 깃든 상여계, 유학계가 존속했고 자연을 숭배한 산신제, 기우제 등도 지냈다.


이러한 전통과 공동체는 한탄강댐 건설로 이주하게 됨에 따라 사라졌다. 마을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흩어졌지만, 나고 자란 고향 산천과 온 마을 사람이 함께했던 정서, 마을 스피커로 들었던 배뱅이굿, 서영춘·고춘자 만담은 귓가를 맴돌 것이고, 가설극장에서 본 ‘슬픔이여 안녕’,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영화 장면은 눈앞에 아른거릴 것이다. 또 군인들이 운영했던 야학에서 고단한 몸에 졸면서도 눈 껌벅이던 어린 시절의 자신도 종종 발견할 터이다.


연구조사를 하면서 가장 염두 한 점은 ‘그 터에 살았던 사람과 마을의 특색을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잘 구현해 낼 것인가?’였다. 또 역사와 인간 발달 전공자로 ‘역사적 사실 속에 사람이 드러나게 하자.’는 생각도 가졌다.


이 자세로 한 분 한 분을 만났다. 인터뷰 시간과 장소는 이주민 사정에 맞췄다. 아침 농사 후 일터로 가는 분은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때로는 고된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끝낸 분을 만나기도 했다.


인터뷰하고 자료를 받고, 확인 등을 위해 열 번 정도 만난 분도 있다. 길게는 4시간, 짧게는 1시간 정도, 마주 앉아 두런두런 삶과 마을 얘기를 풀어나갔다. 그분들의 얘기를 들으며, 3년 전에 관인의 멋진 산세와 향로봉 너머로 넘어가는 석양에 반해 여생을 살기 위해 들어온 지역에 대해 ‘내가 잘 몰랐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이 놀기 좋은 자연조건을 갖춘 마을이었다.” “골목 골목이 다 놀이터였다.” “지장산과 물 맑은 계곡은 자랑거리죠.” “맨날 가마소, 용수개비에서 물놀이하고 놀았죠.” “개울에 가서 손으로 떠도 물고기 잡혔죠.” “이만큼 좋은 곳(자연)은 없죠.” 등의 말씀은 교동마을과 신흥동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반면에 “고생 더럽게 했지.” “안 해 본 일이 없어.”. 가슴이 ‘쏴’ 하면서 아린 말씀은 먹고 살아가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우리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이 가난에서 헤어나도록 해야 한다. 청년들이 아침 일찍 집집마다 들러 퇴비를 저 꼭대기 산, 밭에 갖다 드리기도 했어요.” “밥할 때마다 부뚜막 절미통에 쌀을 넣었지.”. “조, 수수, 콩, 옥수수 재배하고 버섯재배, 누에키우기, 소를 키우기도 했지. 광산에 다니기도 했고.” 어떤 태도로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았는지 알게 했다.


“설날이면 집집마다 세배 다녔지.” “보름 때는 쥐불놀이를 했지요.” “여름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솥단지, 수박, 참외 등을 들고 계곡에 모여 종일 먹고 놀았지.” “추석 때는 콩쿨대회를 열었지요.” “겨울에는 동네 아낙들이 박으로 만든 물장구치며 노래 부르며 놀았지요.” “가설극장에서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을 본 기억이 있어.” “척사대회 때는 윷놀이, 박 터트리기 게임 등을 종일 했지요.” “산신제를 맡을 사람은 일주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준비했어요.” “비가 안 오면 어르신들이 치를 들고 용수개비에 가서 물 까불기를 했어요.” “집집마다 부녀회에 가입했다.” “못 살아도 서로 나눠 먹었다.” “자존감이 높은 마을이었다.”. 마을의 풍속과 문화, 염원, 공동체 정신, 자부심을 엿보게 했다.


“큰 나무들은 6.25 전쟁으로 다 손실돼서 전부 민둥산이었죠.” “여기는 군사 지역이어서 미군들이 탱크 타고 훈련을 많이 나왔어요. “휴전선하고 가까우니까 대남 방송을 하도 크게 해서 많이 들렸어요. 학교에서 삐라 같은 거 보면 주워 오라 해서 막 뭉텅이로 떨어진 거 주워 가면 공책 같은 것도 주고 그랬었죠.” 역사의 강줄기에서 이주민들이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들은 현재진행형이다.


“2013년까지 유학계가 있었어. 이제 그런 것도 다 없어. 댐 생기는 바람에 양문, 서울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런 것도 못 하는 거지. 한 3년 이주 문제로 시행처와 싸웠어요.” “처음에 우리는 수자원공사에 땅값 보상을 안 받을 테니까, 이주단지 다 조성해 주고 이사할 때 이사 비용만 주라고 했어요.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보상가보다 높은 이주지 땅값으로) 빚쟁이가 될 수밖에 없죠. 빚을 안 내고 어떻게 해 돈이 없는데. 그래서 이게 참 슬픈 얘기예요.” 이 말씀들은 이주로 인한 공동체 붕괴와 현실적인 이주 문제에 맞닥뜨리게 했다.


사라진 마을을 그 마을에서 살았던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 기록을 남기는 작업은 후대와 미래를 위해, 이주민을 위해서도 가치와 의미가 크다고 본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은 기록을 남기고, 그 기록으로 후대가 문명을 발달시켜 왔기에 가능하다.”라고 했다. 이 말이 실현되는데 이주민 조사연구가 조금이나마 도움 됐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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