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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게 한 거짓말

인사라도 해주지 그랬어.

by 글지은


영훈은 매일 도서관에서 만나는 순간마다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웃으며 반겨주는 그 얼굴을 보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7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점점 말라가는 게 보였다. 같이 웃으며 책을 읽고, 말을 주고받는 순간이 너무 즐거워서 알지 못했다. 함께하는 순간들이 너무 즐거워서 다른 건 보이지 않더라. 책을 읽다가 갑자기 화장실 간다고 갈 때도 아픈 표정 없이 가는 영훈이 진통제를 먹는 것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루라도 빨리 알았으면 맨날 만나자며 조르지 않았을 텐데…. 10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을.

그는 말라가는 몸을 가리려 주말이면 박스티를 입고, 항상 청바지를 입었다. 아무리 가려도 얼굴이 말라가는 건 감추기 힘든데 그저 살이 빠지는 줄로만 알았지 시한부라는 건 몰랐다. 함께 손을 잡고 걸어 다니는 산책길, 둘이 만화책 빌려 보려고 가던 책방이 즐겁기만 했다. 책방에 가면 공통으로 보는 만화책 하나는 <드래곤볼>을 둘이서 한 편씩 돌려가며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일은 아니어도 가끔 가는 책방은 또 다른 데이트 장소였다. 그 와중에도 난 같이 있는 것만 즐거워서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약을 꺼내 물과 함께 먹을 때면 영훈은 웃어 보이며 속이 좀 안 좋아서, 두통 때문에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댔다. 안 좋은 것 같은데 굳이 말을 하지 않는 그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었다. 물어보려 할 때면 그의 표정은 절대 말하지 않을 거라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난 끝까지 알지 못했다.

날씨가 꽤 차가워진 가을 후반, 영훈이 말했다. “부탁이 있는데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 있는데 같이 갈래요?” 도서관이나 책방, 오락실이 아닌 다른 곳을 청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를 따라간 곳은 단풍나무가 가득한 산책길이었다. 엄마랑 자주 걷는 길이고, 가을에 제일 예쁜 곳이라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붉게 물든 단풍잎이 예쁘고 가는 길마다 깔린 붉은 단풍잎 위에 있는 발자국이 폭신폭신 눈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같은 길을 깍지 손으로 맞잡고 걸어가는 길이 기뻤다. 오랜만에 뻗어주는 그의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주니 웃음이 났다. 그때의 우리는 깍짓손 끼고 커다란 손이 인사해 주는 것만으로 서로 좋았다.

예쁜 단풍길의 끝자락을 돌아오는 길, 영훈은 어머니의 묘를 보여주었다. 지금이야 대부분 화장을 하고 봉안당에 모시지만, 그때는 선산이나 고인이 원하는 곳에 비석을 세워 묘비로 모셨다. 어머니의 묘는 정갈하게 정리되어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매일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라는 글이 쓰여있었다. 처음 뵙는 자리를 남색 치마에 하얀 교복 남방, 남색 넥타이에 검은색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라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한테 인사하라고 하는 영훈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지은이예요” 인사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영훈이 피식 웃었다. 같이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웃음 가득 환했다. 내가 본 마지막 그의 모습이었다.

학교도 다르고 서로 집 주소를 알아도 가본 적이 없었다. 늦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올 때도 그는 도서관에 나오지 않았다. 첫눈은 같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영훈은 함께 하지 않았다. 그에게 난 어떤 사람이었을까? 처음으로 지영의 앞에서 펑펑 울었다. 친구 앞에서 울어본 적 없는 나였는데 딱히 털어놓을 곳도 기대어 울 곳도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지영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울기만 했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아프게, 허무하게 끝났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방학이 오기 전 우연히 만났던 영훈의 친구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췌장암 말기였다는 사실과 이미 전이되어 손 쓸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하지 않았냐고 묻자 다른 장기로 전이 됐다는 말을 듣고 조금씩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단풍길과 어머니의 묘에 인사하러 간 건 내게 “안녕. 고마웠어”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알았다고 한들 할 수 있는 일도 만날 방법도 나에게는 없었다. 어릴 때도 인사 한 번 못하고 단짝 친구를 떠나보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도 말 한마디 없이 떠나는 건 내 인생의 규칙이 되나 싶더라. 영훈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마음속에 별자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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