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 며느리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
시어머니에게 살림을 배우라는 말.
항상 부족하고 뭘 모르는 내가, 어제까지만 해도 남이었던 남편의 어머니에게 살림을 배우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근데 주부생활 12년차에 접어들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살림은 그냥 배우는 게 아니다. 거저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실, 엄청난 도제식 교육으로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살림이다. 독학으로 배우려면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고, 그마저도 살림의 총량이 어느정도나 되는지 가늠하지도 못한채 부분만을 체득하게 된다. 요리 못한다고 결혼생활 10년 내내 3-4가지의 국, 볶음밥과 불고기 정도만 무한 반복해서 해먹는 생활도 가능하고, 50년대 생 엄마들이 하는 만큼 한식을 섭렵하고 화초를 기르며 애완동물까지 키우는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개인마다 엄청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살림이다.
신혼을 맞벌이로 시작하는 많은 부부들은 부부가 공평하게 반반씩 살림을 나눠서하면 편하고 쉽게 살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단히 큰 착각을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결혼생활은 호텔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텔생활은 먹고, 자고, 씻고, 입는 것만 해결되면 간단하지만 살림은 그렇지 않다.
살림은 환경을 만들어나가고, 살림살이를 준비하며, 한국인의 습성과 생활을 체득해서 다음세대에 물려주는 일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특히 자식을 낳았다면 호텔처럼 깨끗이 입히고 씻겨서 키워내는 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와 한국인의 문화와 한국인의 물질까지 가르쳐야 한다. 그러자면 부모부터 한국인이어야 한다.
우리나라 마트에 가보면 각종 밀가루, 각종 야채류, 말린 고추 한포대, 녹말, 엿기름, 무말린 것 등을 파는 코너가 꽤 큰 규모로 자리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해당 없는 코너인데, 아직도 거대하게 코너를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는 그 제품들을 빈번하게 산다는 뜻이 된다. 누가 사는가? 우리 엄마 세대들이 산다. 그 인구가 우리들보다 훨씬 거대하다. 그래서 마트에서 아직도 그런 코너들을 대규모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인구들이 선거권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정치는 언제나 전 연령대를 아울러야 한다. 마트에서 아욱, 부추, 얼갈이, 녹말, 엿기름이 사라지게 될 때쯤에 정치가 변할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인류가 돌도끼로부터 도구를 발전시켜 나갔을 때, 기존의 것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었을 때 그것을 문화라고 여기며 퇴락을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존의 것을 완벽하게 새것으로 대체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세탁기와 다듬이방망이가 그런 것이고, 돌칼과 쇠칼이 그런 것이다.
한국인인 채 기존의 것을 버려도 완벽하게 한국인일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기존의 것을 버리면 더이상 한국인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런 구분을 잘 해나가며 문화와 기술을 취사선택해나가야 한다. 기술의 영역과 문화의 영역을 구분하고, 문화의 영역은 보수적으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문화적인 영역을 지키려면 배움이 있어야 한다. 특히 생산에 대한 배움이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두부를 직접 쑤고, 막걸리를 직접 담그고, 메주를 뜨고, 장을 담갔다. 모든 가정이 다 공평하게 해냈던 일들이다. 그런데 이제 아무도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게 되자, 어린 시절 그런 일들을 어깨너머로나마 구경했던 기성세대들이 정보독점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런 기술들의 가치를 재빨리 깨닫고 명인들을 찾아 돈을 주고 제자되기를 자처한다. 그런데, 사실 내 주위에도 그런 명인들이 두서넛은 있다. 바로 내 엄마아빠, 배우자의 어머니아버지다. 시어머니, 친정엄마, 누구라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