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안된 육아이론 - 혼자 노는게 가능한 애가 책을본다
애를 낳아 키운 지 12년차
내 아이를 키우면서도 간혹 육아경험 증폭의 순간들을 맞이하는데,
대부분 남의 집 애를 키우는 경험담을 듣거나 직접 봄으로써 이루어진다.
일단 우리집 애는 책을 잘 본다.
혼자 있는 시간 대부분엔 책을 본다.
밖에 나가 뛰어놀았으면 좋겠는데도 집구석에 처박혀 책을 본다.
'우리 집 애는 책을 하나도 안봐요'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아이다.
책을 잘본다는 특징으로 우리애에게 어떤 장점들이 파생되었는지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겠다.
이 글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 글의 주제는
'어떤 애가 책을 보는가'에 대한 글이다.
우리 애가 책을 잘 보기 때문에
우리 애의 모든 특성들을 깨알같이 분석해서
이러이러한 애가 책을 잘본다는 식의 결론을 내 볼 수도 있겠으나
12년간의 직접/간접경험을 통해 최근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애가 책을 본다'
혼자 있다는 것은 어른이 없는 집에 애가 혼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어른과 그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하면 굳이 어른에게 와서 떼를 쓰지 않고 혼자 할 걸 알아서 찾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심심할 때, 그 심심함을 타인으로 해소하는 사람은 책을 보지 않는다.
이것은 선천적일 수도 있고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일 수도 있다.
일단 나는 나의 개똥이론을 내 경험에만 비추어 풀어보겠다.
나는 우리 애가 어렸을때부터 애를 직접 상대하는 방식으로만 애를 키우지 않았다.
아이와 같은 공간에 있어주긴 했지만 애랑 매번 1:1 상대를 해주는 식으로 양육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옛날방식으로 키우고자 노력했다.
그냥 놔두는 방식이다.
우리애도 분리불안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엄청난 집착남이었기 때문에
나와 몸이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 쉽게 적응을 한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이런 특성을 그대로 무한정 계속 받아주기보다
옛날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고자 했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기다리라고 했고
엄마가 다른 사람하고 통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방해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고
엄마가 집에서 알바를 하며 일해야 할때도 기다리라고 했다.
그대신 엄마가 개인적인 놀이를 하느라 애를 방치하는 일은 없도록 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조용히 하라고 한다거나,
다른 어른 놀이를 하는 동안 아이를 혼자 놀라고 하지는 않았다.
어쨌건, 엄마에게 '공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아이가 인지하고 받아들이도록 했고,
이 순간에는 아이가 엄마를 방해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어느순간부터 엄마가 공적인 뭔가를 하고 있는 동안 나를 방해하지 않고 혼자 놀 거리를 찾아서 조용히 지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전화통화를 해도 전화를 뺏거나 소리지르거나 울며 떼쓰지 않았고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중간중간 언제끝나냐고 물으러 오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혼자 놀거리를 알아서 찾아 논다.
집이란 같은 공간에서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일을, 각자의 공간에서 할 때에는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뭔가가 어려서부터 만들어진 것 같다.
내가 계속 집에서 일을 하는 직업을 가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혼자 버텨야 하는 시간 동안 우리 애는 거의 책을 본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때도 있고 책을 볼때도 있지만
나는 아이의 자유시간에 뭘 하라고 지시하거나 유도하지 않는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은 길어야 10분이지만 책을 보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을 버티게 해준다.
그래서 책을 보는 것 같다.
다른 집 아이 이야기로 넘어가볼까?
다른 집 아이 중 책을 잘 보는 집을 몇 집 안다.
그집들 상황도 비슷하다.
중간과정은 잘 모르겠으나 그집 엄마들하고 얘기를 해보면 꽤 이른 나이부터 집안 분위기가 고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안에서 각자 공간에서 각자 할 것을 찾아서 하고 서로 치대지 않는다고 한다.
결과론적인 분석인지, 유도된 양육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책을 잘 보는 아이는 시간을 혼자 보낼 줄 아는 아이들이었다.
집에 가족들이 같이 있어도 아이들이 부모한테 와서 치대지 않고
책을 보다가, 지겨워지면 보석십자수를 하거나, 색칠공부를 하거나 등등
나 뭐할까? 하고 엄마에게 의견을 묻긴 하지만
엄마를 하인이나 종처럼 자기 옆에 대기시키고 계속 같이 해달라고 조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부모들이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같이 있어주되 이래라저래라 아이의 시간을 일일이 통제하지 않는다.
아이가 책을 잘 본다고 해서 더더더 책만 보라고 밀어넣지도 않고
책 좀 그만보고 나가서 놀라고 한다거나 학습지를 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반대 이야기들을 풀어보겠다.
내가 다른 집 엄마들과 전화를 해야될 때나
업무적으로 전화를 해야 되는데 그 사람이 집에 있을 시간일 때
전화 통화를 하다보면 상대방 집 애들이 소리지르고 울고 자꾸 전화를 방해해서 전화통화가 중단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우리집에선 상당히 어리둥절한 상황이다.
엄마가 전화를 하는데 왜 애가 울지?
신생아도 아니고 초등학생을 키우는 집에서도
아이가 자꾸 엄마더러 전화를 끊으라고 성화다.
그리고 부모들 자체가 '집에 가면 애들때문에 일을 못한다'고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엄마가 타인과 통화를 하고 있는데 자꾸 자기가 옆에와서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어리니까 귀엽게 봐주는 것이지 어른이 그랬으면 예의없는 행동이다.
나는 우리 애가 이런식으로 행동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하니까 어렸을때부터 안그랬던 것 같다.
어차피 가르쳐야 할 예의범절이라면 처음부터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열살이나 먹은 애들도 계속 저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2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애초에 엄마가 타인과 통화하는 것을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전혀 배운 적이 없거나
자기가 이렇게 방해하면 엄마가 쉽게 전화를 끊더라 하는 것이 학습되었기 때문인 경우로 볼 수 있다.
나는 집에 가도 일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애가 있건 없건 아무 상관이 없다.
중간중간 언제 끝나냐고 물으러 오긴 하지만 일 자체를 하지 말라고 방해하진 않는다.
내가 일을 하는 동안에
우리애는 책을 보거나 영상을 보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마음대로 한다.
심지어 숙제를 알아서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상상해본다.
사람에 의지해서 심심함을 해소하는 아이를 키웠던 집은
아이 키우는 방식을 적극성+분리 2가지의 원칙 내에서 해온 것이 아닐까 하고.
아이와 함께 있을 때에는 부모 자신을 갈아넣어서 뭔가를 늘 함께 해주는 적극적 육아를 하고,
또 자신들이 집안일이나 공적인 일을 해야 할 때는 아예 아이들과 공간을 분리해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공적인 모습에 적응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육아를 했던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그저 옛날 방식처럼
아이와 나를 공간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늘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나의 공적인 업무들을 아이의 일상으로 스며들게 했고
그러다보니 아이와 같이 있는 24시간 동안 어느정도는 아이와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시간도 존재하지만 느슨한 시간도 있고, 각자 따로 볼일 보는 시간도 있는 등
아이의 자율성이 알아서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준 것 같다.
뭘 알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해놓고 보니 그렇게 된것이다. 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자기 시간은 자기가 알아서 채울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책을 읽건 숙제를 하건 혼자 놀건 알아서 굴러가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터치를 전혀 하지 않은 것 역시 아이의 자율성을 자라게 해준 자양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가지 다른 측면으로 잘한 것이 있다면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않은 것.
스마트폰을 주지 않아서 심심해지면 할일이 없어서 책을 보는 것 같다.
본인의 여가시간을 사람으로만 푸는 타입인지
개인시간으로 채울 수 있는 타입인지
그 가능 여부가 '책'으로의 관문으로 가는 핵심 열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