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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일휴업 Oct 12. 2021

요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2일 차 - 기다림의 두통과 어린이 타이레놀 여섯 알 

요시고전

ticket

대구 촌놈은 이 전시가 이토록 핫한 것인 줄 꿈에도 몰랐다. 대구 사진비엔날레를 검색하다 밑에 뜨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모르고 예매를 해두었다. 투명한 물속에서 유영하는 사람과 규칙적으로 배열된 창문의 이미지가 매력적이었다. 안국역에 내려 깡통만두를 먹고, 쏘리쏘리에스프레소바에서 타르트와 에스프레소까지 한 잔 걸친 다음 천천히 그라운드 시소에 입장하는데 그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마치 방금 떨어진 유에프오를 둘러싼 것만 같은 인파의 웅성거림을 뚫고 웨이팅 기계에 전화번호를 찍자 청천벽력과 같은 글자가 나타났다. 예상 대기시간:2시간 30분. 



기다림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서울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 중 가장 특징적인 것 중 하나로 웨이팅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다. 이건 서울의 특징이 아니다. 대구에서도 금요일 저녁 소위 '핫플'이라 불리는 곳들이 몰려 있는 교동 뒷골목 술집을 가려고 할 때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구의 나는 그런 일을 겪지 않는다. 대구의 나는 로컬인이고 따라서 검색을 통해 음식점을 찾아가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갔던 분식집과, 빵집, 카페에 대한 고유한 데이터가 내 안에 존재한다. 


서울은 다르다. 마포역 근처에서 국밥을 한 그릇 먹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네이버 지도에 국밥을 검색 한 다음 후기를 샅샅이 비교하기 시작한다. 핫플은 필연적으로 검색과 연관되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검색을 한다. 가게는 한정된 공간이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다. 기다려야 한다. 이런 곳을 바로 핫플이라고 부른다. 핫플 중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곳도 있고, 잘못 따르는 바람에 거품만 가득한 맥주 같은 곳도 있다. 그 비율은 3:97에 가깝다고 본다. 맛있고 멋있는 가게 100개 중 3개 정도가 그 뜨거움을 잘 품은 채 활화산에서 휴화산으로 변해가는 것 같고 나머지 97군데는 너무 빨리 오븐을 열어버려 폭삭 주저앉은 케이크처럼 뒤안길로 사라진다. 어디로 여행을 가든 로컬인처럼 즐기고 싶다는 강박이 심한 나로서 가장 쉬운 방법은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그들이 추천해주는 곳들도 모두 핫플이었다. 줄을 서야 했고, 수강 신청하듯 예약을 해야 했고, 포기해야 했다. 이쯤 되면 서울은 그냥 인구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아니면 '핫'이라는 것 자체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용광로적 특성이 어느 정도 녹아 있다고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아니 핫플 타도론이 아닌, 기다린다는 행위의 희소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넘어가자. 입장해야 할  시간이다.  


카페 안은 요시고전 관람을 기다리는 인파들로 가득했다. 

어쩐지 동지애가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다시, 요시고전

전시를 보러 가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사진이나 그림을 보러 온 게 아니라 갤러리라는 공간을 느끼러 온 것 같다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간결하게 정리된 흰 여백의 공간은 때로 전시물 자체보다 더 큰 감흥을 주기도 했다. 요시고전은 달랐다. 모든 것이 가득 차 있었다. 흰 벽과 사각형으로 구획된 공간이 없었다. 나선형의 계단 끝에서 컬러풀한 벽들이 나타났고 관람 동선 또한 곡선적이었다. 사막 여행과 관련된 전시실에는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기도 했다. 


요시고씨 인터뷰 영상

요시고의 사진을 보면서 이것과 '유사한'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 같다. 필름 카메라 좀 들고 다닌다 하는 사람들 중, 아파트의 창문이나 나선형 계단을 보고 셔터를 눌러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않은 사람은 몇 안 되리라. 그의 사진은 난해하거나 충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진 좀 찍는다는 누군가의 인스타에서 볼 법한 사진이지만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세련됨이 그에겐 있다. 그 세련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세련이라는 단어 속에 답이 존재한다. 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능숙하고 미끈하게 갈고닦음. 그의 사진엔 서투르거나 어색한 구석이 없다. 능숙하고 미끈하다. 왜? 엄청 많이 찍었으니까. Yo sigo(계속 나아가다)라는 그의 이름처럼 계속 나아갔기 때문이다. 


건물 사진을 찍을 때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긴 요소는 빛이라고 한다. "촬영지 선택 후 휴대폰 앱을 통해 빛이 언제 그리고 어떤 식으로 비출지 먼저 예상을 합니다. 대부분 이렇게 준비해도 실패해요. 하지만 이런 과정이 있어야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성공적으로 찍을 수 있는 순간이 옵니다." 이 이어지는 세 문장 속에서 나의 심장을 가장 세게 때린 것은 두 번째 문장이다. '대부분' '이렇게 준비해서' '실패한다'는 두 번째 문장. 전시의 마지막 즈음에 요시고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열정과 인내심. 나선형 계단을 따라 출구로 내려오며 그 두 가지 단어를 곱씹었다. 이건 공들이고 싶은 모든 세상만사의 엑셀과 브레이크에 해당한다고. 


우린 그것들을 번갈아 밟으며 계속 나아간다.      



번외-여시고병

  

전시를 보고 나와 남자친구와 집으로 가는 동안 우린 수많은 건물과 마주쳤다. 그때마다 요시고네? 요시고다! 요시고잖아 완전. 을 남발했다. 모든 건물이 요시고의 필터로 보였다. 내가 건물을 찍어서 보여주자 남자친구는 완전 여시고네 여시고. 하며 웃었다.(나는 여씨다.) Yoe-sigo. 

여시고병은 당분간 쉽사리 고쳐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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