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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일휴업 Oct 08. 2021

작은 이사와 의외의 음식들

1일차 - 식도락 여행 아님 주의 

intro

서울에 한 달 살아보기로 했다. 요즘은 어딘가에 한 달을 사는 형태의 여행이 '한달살기'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흔하다. 동시에 자신의 생활(업무, 출장, 지인찬스, 고향...등)등 관련되지 않은 어떤 생뚱맞은 지역에 한 달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체류하는 일은 오히려 흔치않다. 흔하고 흔치않은 이런 형태의 여행을 펼칠 장소로 선택한 곳은 서울이다.                      

이사목록 - 미니멀리즘의 허구성

가서 뭐 할 거야? 계획은 있어? 서울에 간다고 하고나서 많이 들은 질문이다. INFJ형으로써 평소 스케줄러를 사용한 철저한 계획적 루틴 하에 살아가는 나지만 여행에 있어서만큼은 무계획이 계획이다. 나름의 코드가 있긴 하다. 어떤 지역을 가든 이 코드를 조합하여 관광을 진행하면 된다. 순서는 의미없다. 


00-재래시장 01-고분군 02- 산책로

03-캠퍼스 04-도서관 05-건축물

06-보호수 07-빈티지 옷집 08-책방

09-영화관 10-라테맛집

11-크로스핏 박스 12-전망대 13-성당


이전에 다녔던 여행에서 의외로 재미있었던 곳들을 메모 해 둔 것들이다. 포인트는 여행도 재미도 아니고 '의외'다. 기대를 배반하는 의외가 아니라 없던 기대를 충족시키는 의외다. 

 


의외의 음식-1 괴산휴게소의 통밀유부우동

휴게소 맛집 어디야? 차로 나를 실어 나르던 중인 남자친구가 물어서 급하게 검색을 했다. 괴산 휴게소의 후기가 많이 보였다. 사과가 특산물인가봐. 사과 돈가스랑 사과 하이라이스가 맛있다네. 휴게소에 들러 가득 찬 방광을 비워내고 도착한 푸드코트에는 하이라이스가 없었다. 단종 됐나봐. 하이라이스 대신 유부우동을 시켰다. 돈까스는 모두가 예상 할 수 있는 그런 맛이었다. 잠자리 지우개 색깔의 돈육과 고동색 소스. 사과가 소스에 들어간 건가? 사과 맛은 안 나는데? 남자친구가 의문을 품는 동안 난 우동 면발을 집어 올렸다. 그러곤 놀랐다. 그제야 유부우동 앞에 '통밀' 이라는 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면이 누런색이었다. 흰 밀가루와 흰 쌀밥을 먹을 때 마다 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일단 면의 색상에 아름다움을 느꼈다. 한 입 먹어보자 쫄깃함이 마치 유명 족타면 집의 우동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국물 간도 딱 맞았다. 섭섭지 않게 들어 있는 넉넉한 유부와 색감을 보완해주는 상추와 고춧가루까지. 이런 음식들을 만나면 늘 블라인드테스트에 대한 갈망에 시달린다. 유명맛집과 휴게소 우동을 구분하시오.  



의외의 음식-02 공덕이마트 푸드코트의 뉴욕버거

해쉬브라운을 추가한 통새우버거

필요한 물건을 사고 어중간한 시간에 또 밥을 먹게 되었다. 푸드코트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분식과 버거였다. 뉴욕버거? 국내 브랜드인가? 처음 보는 햄버거 브랜드를 두고 고민했지만 떡볶이 보다는 버거였다. 해쉬브라운은 따로 시켜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데 여긴 버거 안에 추가 할 수 있어 기뻤다. 결론은 다운타우너와 제이티살룬보다 맛있었다. 야채는 더할나위없이 싱싱했고 튀김들은 바삭했다. 패티 안의 새우살은 제대로 '통'이었다. 소스는 강하지 않게 전체와 잘 어우러졌다. 이건 좀 색다르다, 라는 느낌 없이 완전 정석적인 새우버거인데...비범한 평범함이랄까. 한 두 번 더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의외의 음식-03 성미골 이베리코 돼지 구이 

망원동에 사는 분들이 엄청난 고깃집이 있다고 데려갔다. 이 유명한 맛집이 '의외'의 음식으로 선정 된 이유는 구워 먹는 고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의 기호 때문이다. 맛있는 집이라고 가보아도 그렇게 맛있었던 기억도 없다. 고기가 고기지 뭐. 그러나 망원동 고기대장님이 데려가주신 이 집은 달랐다. 이베리코가 뭔지 아냐? 는 질문에 남자친구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막연히 시베리아 같은 것이 연상되면서 아주 추운 곳에서 자란 돼지인가...?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스페인에서 자란 돼지라고 했다. 넓은 초원에서 뛰어놀며 도토리를 먹고 좀 오래 삶을 누린 돼지의 종류였다. 고기대장님이 목살을 알맞게 구워 주셨다. 소금에 찍어 먹었다. 터졌다. 입에서 불꽃 놀이가 시작되었다. 이국적인 초원과 도토리와 행복한 돼지가 입 속을 뛰어다녔다. 한 점 더, 한 점 더, 목살에서 치맛살로 꽃살에서 차돌박이로 고기의 연회는 이어졌다.


사람이 가진 모순 중 가장 순수한 것은 언행불일치일 것이다. 제일 티가 잘 난다. 그 자리에서 가장 열렬히 고기를 먹었던(후에 고기대장님께 인정 받은 사실이다.) 나는 사실 내부적 채식인이다. 혼자 있을 땐 완전 채식을 한다. 집에서 먹을 땐 두부와 바나나, 현미밥과 쌈채소를 주로 먹는다. 우유로 만든 라떼를 몹시 좋아하지만 요즘은 오틀리로 변경 해 주는 곳을 찾아서 간다. 그러나 친구들과 식사를 할 때는 메뉴를 부러 고르진 않는다. 이런 걸 플렉서테리언이라고 하는 걸 어디선가 들었지만 그것보다 내부적채식이라는 단어가 더 마음에 든다. 동물은 죽는 것이 아니라 그저 끝난다.* 라는 문장을 읽고 오후 내내 가슴 한 켠이 아리기도 하지만 이따금 이베리코 돼지의 살점을 게걸스럽게 씹어삼키기도 한다. 연민을 가지게 만드는 대상을 먹어치울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늘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돼지와 나를 가로 막은 여러 겹의 과정들을 생각한다. 편리하게 잊는 기능을 가진 인간의 얄팍한 두뇌를 생각한다. 합리화라는 생존본능에 대해 생각한다. 











*잡지 domus에 실린 동물 관련 칼럼 중 인용 된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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