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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레이 칼라(Gray collar)가 된 이유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

by 그레이칼라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나와 동생에게 하셨던 말씀 중에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너희 아버지도 실속 없는 일한다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공장 같은데 취직해서 월급 따박따박 받아오는 게 엄마 소원이다. 너네는 어떻게 해서든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살아라."


아들이 내일모레면 마흔이 되는 나이인데도 매번 걱정 어린 표정으로 정년까지 잘 버티라고 조언을 하시는, 우리 어머니는 57년생 베이비부머 세대이다. 평생 가족에게 헌신하며 바르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엄마,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 정년은 없다니깐."하고 쉽게 얘기를 뱉지는 못하는 편이다.


어머니는 '안정적인 삶'을 목적으로 삼으라 하셨고,
그 방법을 '공장(직장)'에서 찾으셨다.


안정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는 생계를 문제없이 이어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안정을 추구하는 삶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라 말할 수 있다.


나의 어린 시절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본인은 83년생 돼지띠)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고는 베이비부머 세대는 팽창 사회를 살아왔다. 그들에게 돈을 버는 방법의 차이에서 기인되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사회적 양극화의 온도차는 지금처럼 생존의 문제를 거론할 만큼 크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차는 있었겠지만.


사회라는 한정된 무대가 고학력자(?)들의 무리들로 점차 채워져 가면서,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블루 칼라'들이 가진 경쟁력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하얀 칼라의 셔츠와 양복을 입고 사무실 안에서 지식 노동을 하는 '화이트 칼라'가 되는 것이 선망이 되었다. 그것이 곧 성공하는 삶을 보장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는 듯했다.


좁은 문을 뚫고자 줄을 세우는 시스템 속에서 더 높은 학력을 갖춘 보편적 인재를 요구하게 되었고, 사회 구성원들은 획일화된 성공 방정식 아래서 새로운 기준을 넘어서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해오고 있다.


내가 제목에서 그레이 칼라를 언급한 이유가 뭘까?


그전에 그레이(Gray)의 의미는 풀어야 할 애매한 영역의 문제에 가깝다고 정의하고 싶다. 그리고 정리가 되지 않은 것들을 몰아서 불안정하게 뒤섞어 놓은 공간을 그레이 존이라 지칭하려고 한다. 그레이 존에 들어간 문제들은 쉽게 말해서 확인하기 싫거나 구분 짓기 어려운 것들을 그냥 버려두는 것이라고 인식해서는 안된다. 그냥 내버려 두게 되면 그것이 정말로 잊히게 되거나, 혹은 더 좁아진 문을 뚫고 나오려는 경쟁의 구도로 다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레이칼라(Gray Collar)의 사전적 의미는, '화이트 칼라(White collar : 지식 노동자)와 블루 칼라(Blue collar : 육체 노동자)와의 중간층으로 현대사회가 기술혁신에 따라 종래의 노동과정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변화하자 점차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 쌍방향에서 상호 간의 성격의 차이를 좁히는 형태로 접근이 이루어져 생기게 된 것'으로 사회의 변화로 인해 새로 생겨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블루 칼라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화이트 칼라가 되는 것을 선망했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로 인해 노동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사람들은 평준화된 삶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이 과정에서 선을 긋기가 어려운 것들을 그레이 존 안에 그냥 내버려 뒀다. 이것이 오늘날 내가 그레이 칼라가 된 이유이다. 나를 포함한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을 해서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그레이 존으로 내몰려 있는 중이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해온 '안정'을 추구해오던 삶들이 대부분 그레이 존으로 던져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적응 혹은 진화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과중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변화'하기를 강요받고 있다. 그것은 불안정한 심리와 현실 문제로 연결되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 문을 찾아 헤매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마저도 대책 없이 문 앞에서 그냥 멈춰 서버리고 만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열었고, 기술로 세상의 생태계를 새로 만들어가는 리더들 대부분은 노칼라 혹은 실리콘 칼라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갖춰왔던 성공의 공식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창조적으로 변화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을 하기 어렵다면, 지금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물론 극단적인 결과는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를 턱 하니 꺼내어 새로운 잣대로 삼기 시작했고, 그동안 힘겹게 만들어온 안정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그레이 칼라들은 급속히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지식'과 '경험' 그리고 그들을 위한 '시스템'이 부족한 상황에 처해있다. 눈 앞에 마주한 삶을 이어가는 것에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나면 알고 싶은 마음조차 쉽게 들지 않는다. 불안감을 조장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그레이 칼라들이 한꺼번에 노칼라가 될 수 있을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이 그레이 칼라인 우리들 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변화의 주체인 사람이 바뀌려면 주위 환경도 함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관점에서 올바른 추진과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레이 존으로 던져진 수많은 그레이 칼라들의 삶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는 통찰과 지혜를 나누고, 얻고자 함이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변화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낡은 시스템 속에 숨어있는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는 안정된 삶을 보장해줄 과거의 공식도 없을뿐더러 쉽게 예견을 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야말로 그레이 존에 들어가 있는 문제가 된 것이다. 스스로 알아보고 결정하고 해결을 해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크지 않다고 본다. 변화를 주도하는 리더들이 먼저 바뀌어야 하고, 또 다른 리더 그룹들을 생산해내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올바르게 일을 해서 시스템을 바꿔갈 수 있도록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 줘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게 가능하려면, 일단은 현재의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만족감과 피로감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측정한 문제가 있다면 빠르게 실체화해내어야 한다. 정확한 진단이 가능해야 치료를 위한 변화를 시도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복합된 문제가 포함된 쉽지 않은 여정이다. 과거에 우리가 화이트 칼라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지금은 1인 기업가, 창업가, 그리고 창조적인 노칼라가 되어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노동의 삶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안정의 상태인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


새로운 시대가 원하는 욕구를 향한 획일화가 시작된 것이다. 먼저 간 이들은 저마다의 성공 방정식을 앞세우며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레이 칼라들의 상처 부위를 자극해온다. 새로운 자극이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변화와 발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누구도 혼자서 성공할 수 있는 공식은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하게 기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적용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그리고 이제는 전문가도 없다.


이 말이 주는 의미는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길을 찾고 행동해야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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