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좀 넘어서일까 핸드폰 벨이 울린다. 핸드폰 저 너머에서 서재현씨 맞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 받았던 호르몬 검사 결과가 나왔다며 그동안 나의 자궁을 담당했던 선생님이 직접 전화를 주셨다. 내용인즉 갑상선호르몬 검사는 정상으로 나왔는데, 프로락틴이라는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유즙분비자극호르몬의 수치가 기준치를 훨씬 넘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소견서를 써 줄 테니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두려운 마음에 곧바로 핸드폰 검색 창을 열어 프로락틴이라는 단어를 쳤다. 수치가 높으면 대부분의 경우 뇌하수체에 종양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내용과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경험담들을 읽어 내려갔다. 코를 통해 하는 종양 제거 수술은 간단하지만 3개월가량은 고개를 숙이거나 코를 풀지 말라는 얘기도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겪었던 손가락 사고가 생각나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때 겪었던 뜻밖의 사고와 병원생활은 나에게 상처가 되었다. 혼자 견뎌야만 했던 병원생활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는 내일부터 방학이 시작되어 기숙사를 나와 집에 있을 것이고, 걱정반 근심반으로 애써 붙잡고 있던 목공은 또 3개월 동안 미뤄야 하는 건지, 특히 운동을 3개월씩이나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좌절감과 속상함이 함께 밀려왔다.
우선 대자인병원에 전화를 걸어 다음 주 월요일로 예약했던 건강검진을 이틀 후로 앞당겼다. 그리고 신경외과 검진을 내일로 잡았다. 프로락틴이라는 호르몬수치가 오랫동안 높게 유지되면 유방암에도 영향을 준다는 내용이 생각났다. 오래전 유방혹 제거 수술 후 한 번인가 초음파를 봤을 뿐 거의 10년 동안 사진만 찍은 것이 맘에 걸렸던 터라 유방암검사도 빨리 받아 건강함을 확인하고 싶었다. 가슴 여기저기 찌릿찌릿함이 자주 생기는 것 같고, 프로락틴 호르몬 수치가 언제부터 높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악재는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그런 생각에 갈수록 생각만 많아지고 마음이 불안했다. 건강이 이리도 소중한 것임을 또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나에게 돈은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돈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물건이었다. 그동안 돈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보냈던 날들이 후회가 된다.
다음날 대자인병원 신경외과를 찾았다. 다행히도 아는 수간호사가 있어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방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의사는 다른 의사와 다르게 일에 찌들어 보이지 않았고, 혹시나 하는 병으로 겁을 주지도 않았다. 예전에 알았던 것 같은 친숙한 웃음으로 불안함에 떨고 있는 나를 괜찮을 거라 위로하며 상담해 주었다. 수치가 아주 큰 것은 아니니 걱정 말라며 혹시 모르니 MRI와 뇌혈관, 내분비호르몬 3가지 검사를 제안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고 MRI는 금식 후에 가능하니 내일 건강검진과 함께 하기로 했다. 내일이면 검사 결과가 나올 테니 하루만 견뎌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머릿속은 이미 종양을 어디서 떼어낼지 걱정하고 있었다. 늘 건강하려고 노력했고, 건강식품도 챙겨 먹고, 운동도 거의 7일 중 5일은 꼬박하는 내가 왜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고 속상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대자인병원 3병동 7층 건강검진센터에 도착했다. 나에게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7시부터 온 것처럼 보이는 어르신들로 북적였다. 옷을 갈아입고 우선 혈압을 쟀다. 작년 사고 이후 기계로 혈압을 재면 고혈압 위험 단계가 나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혈압은 정상으로 나왔다. 걱정 하나가 덜해졌다. 이 숫자마저도 고혈압 단계로 나왔다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검사를 마치고 유방암검사를 하러 갔다. 여자의사였으면 좋으련만 왜 대부분 유방외과 의사들은 남자인지 불편하다. 차가운 침대 위에 윗옷을 모두 벗고 모르는 남자 앞에 두 팔을 위로 올린 채 그 남자가 나의 유방 여기저기를 문지르도록 허락해야만 하는 상황은 수치심마저 들었다. 그래서 자궁암검사는 집 앞 산부인과에서 받고 왔다. 누군가 모르는 남자가 내 자궁에 기계를 넣고 여기저기 세포를 떼어내는 상상만 해도 정말 싫었기 때문이다. 비뇨기과 의사는 대부분 남자의사이듯 유방외과나 산부인과 의사들은 여자의사들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특히 유방외과 의사들은 왜 이리 남자의사들로 가득한지 내심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다행히 나의 유방과 갑상선은 이상 없이 건강했다.
이제 기다리던 MRI 검사시간이 다가왔다. 지하에 위치한 검사 장소는 으스스함까지 느껴졌다. 검사도 처음이지만 병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 검사하는 30분 내내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검사가 끝난 후 신경외과 선생님은 어제와 같은 환한 미소로 자세히 봐야겠지만 시티 상으로는 혹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있어도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다행히 종양은 아니라고 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떨고 걱정했는지 하루 만에 폭 싹 늙은 느낌이다.
곧바로 위내시경을 하러 검진센터로 갔다. 수면내시경 때문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냥 자고 일어나니 내시경이 끝나있었다. 이틀 동안 자는 둥 마는 둥 했었는데 푹 잔 것 같은 이 개운함. 모든 걱정은 끝이 났다. 아직 피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나오지 않은 결과를 미리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다. 여러 검사로 엄청난 돈이 깨진 것이 나름 아까웠지만 당분간 건강한 몸에 의지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나름 지금의 나는 괜찮다며, 걱정 없이 스트레스 적게 받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검진 하나하나를 받아보니 ‘스트레스를 이고 살았구나!’를 알게 되었다. 무엇이 괜찮지 않았던 걸까? 나는 오랫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사는 법보다 돈을 버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삶의 목표가 직립보행이라며 늙어서도 노동을 하겠다는 내가 몸의 겉만 신경 쓰느라 정작 속을 챙기지 못했다. 올해 더 늦지 않게 건강검진을 받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