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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이놀이터 Sep 02. 2015

『 빨래하는 페미니즘 』을 읽고서...

한 달 전쯤 글쓰기 모임에 갔다가 란이샘 집에 잠깐 들렸다.

줄 것도 있었고 그동안 얼굴도 못 본 것 같아 들렸는데 란이샘이 나에게 지금의 너라면 이 책이 맞을 것 같다며 꼭! 읽는 조건으로 책을 빌려주셨다. 마침 다음 글쓰기 모임의 주제가 독후감이기도 했고 새해를 맞이하기에 이만한 주제가 없는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왔다. 

'빨래하는 페미니즘' 제목만 봐도 나에게 뭔가 위로를 줄 것 같고 응원의 힘을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학생활 내내 페미니즘을 믿으며 우등생으로 공부했고 졸업 후 직장 안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살아온 주인공이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게 되고 남편과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찾기 위해 여성학을 공부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주인공 스테퍼니 스탈은 '페미니즘 고전연구'수업을 받으면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게 되었고 그 깨달음을 통해 여성학의 이론을 다시 이해하게 되면서 한층 더 성장하게 되었다. 


"페미니스트의 삶과 글을 서로 어떻게 분리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 이후 나는 책장 너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을 파헤쳐보기로 했다. 그녀가 운명의 부침에 맞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한 여성으로서 뿐 아니라 딸로서, 여자 형제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의 운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그녀의 삶을 통해 나는 실로 오랜만에 영감을 얻었다. " 


그녀는 20대 경험으로 이해했던 이론들을 현재 자신의 삶을 통해 다시 이해하고자 했다. 20대에는 이론에 집중했다면 이제 그녀는 그 이론이 나오기까지의 필자의 인생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론에서 놓쳤던 세세한 부분까지도 이해하고자 했다. 아마도 그건 그녀가 이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해석하고 싶은 간절함이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6년 전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에서 일할 때가 생각났다.

센터 2년 차가 되었던 나는 여성학 기본서들을 읽으며 그동안의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은 여러 생각과 경험을 통해 해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었다. 결국 나는 삶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고 성장했음을 느꼈다.

힘이란 무얼까? 스테퍼니는 그 힘을 되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어머니라는 표식을 아름다운 명예의 배지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다시 욕망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으로서,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자로서, 내 몸의 주인으로서, 내 육신 안에 살 수 있게 되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이 나온다.

나 또한 오랜만에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게 되면서 지금의 내 삶을 과거의 나처럼 다시 바라보고 그때의 힘을 얻고자 책 한 장 한 장을 신중하게 넘겼다. 


글은 스테퍼니의 일상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된다.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내 인생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반복적 가사 노동에 저당 잡혀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그 너머의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윤곽이 하루하루 눈에 띄게 사라지는  듯했다."  


스테퍼니는 결혼까지 순차로웠던 그녀의 삶이 출산과 육아를 통해 페미니즘 이론으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성의 삶을 실감하면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다. 이에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페미니즘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는 바너드 대학 강의실로 들어서는 내가 성찬을 마주한 굶주린 여자처럼 느껴졌다는 점뿐이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답을 모른 채 일상에서 표류하던 중에 등대를 만나면 직감적으로 우린 알게 된다. "살 수 있겠구나."

주인공은 삶의 간절함으로 그 대학의 문을 넘었다. 많은 감정들이 벅차올랐을 것 같다. 예전의 대학시절의 자신이 보였고, 잘 나가던 그녀의 30대가 보였으며 점점 사라져 가는 자신이 보였으리라.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얘기한다.


"결혼은 남자들에게 물질적. 성적 편의를 제공해준다. 개인을 외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며 가정과 아이는 공간적. 시간적 안정감을 준다. 결혼은 남자의 생활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준다." 보부아르는 남자들에게 결혼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결혼은 그 자체가 운명의 결정체다. 결혼은 여자들에게 경제적 안정과 손쉬운 도피처와 고정적인 금요일 밤의 데이트를 제공해 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비참함에 갇힌 외로운 두 인간을  남길뿐이다." 


며칠 전 일요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아이와 남편은 TV를 보고 있었다.

나의 부엌일이 시끄러운 듯 안방 문을 닫고 누워서 낄낄대며 TV를 보고 있었다.

요리가 너무 싫은 나는 오랜만에 집에서 저녁을 먹을 남편을 위해 하는 수없이 일처럼 거하게 음식을 준비한다. 거의 1시간가량을 부엌에서 씻고 자르고 볶고 무치고 끓이는 것을 마친 나는 나름 만족 수준으로 식탁을 가득 채웠다. 상원이를 부른다.

'상원아, 밥 먹어라'

'진기씨, 밥 먹어'

소리도 없다. 움직임도 없다.

그들은 여전히 TV를 본다.

나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메아리였다.

나만 들리는.

결국 상원이에게 큰소리를 낸다.

마지못해 상원이와 남편은 식탁에 앉는다.

그리고 식사시간.

남편은 말 한마디 없이 밥만 먹는다. 차라리 이렇게 먹을 거면 빨리라도 먹지 핸드폰에 dmb를 켜 식탁에서 드라마를 보며 느긋하게 먹는다.

그나마 말 많은 상원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진기씨의 핸드폰을 본다. 그리고 둘은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보다만 TV를 본다.

내 앞에는 내 시체인양 밥그릇, 국그릇, 숟가락, 물컵 등이 널브러져 있고 음식 준비한다며 내놓은 식기들은 싱크대에서 산을 이루고 있다.

오늘 저녁 난 그 산을 넘어야만 쉴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때가 되면 화장실에 가듯 아무런 감정 없이 이런 상황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곳에 난 없다. 어떠한 소리도 없다.

그리고 어떠한 고마움이나 배려도 없다

단지 난 내 자신을 다독이는 양 핸드폰만 만지작 거릴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주인공의 남편처럼 많은 일을 해야 했고 주말이면 쉰다는 명목으로 TV가 있는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주인공의 말을 빌리자면 생활을 일과 가족으로 정확히 분리해 여유롭게 살아가는 듯 보이는 남편과 달리 나는 일과 가족으로 나뉜 내 삶의 조각들을 서로 끼워 맞추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다. 억울한 기분은 분노를 낳았다.

그 분노는 나에게서 말을 앗아갔고 우리 부부는 거의 대화 없이 일상을 보내야 했다.

결국 그와 나는 서로의 벽이 되어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서로를 외롭게 할 뿐이었다.


다행히 주인공의 남편 존은 진보적 성향이 강해 주인공을 잘 이해했으며 변화하려 노력했다. 천천히, 점진적으로 바뀌었으며 그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부러웠다. 그래서 이 책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이 책에서 소개된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삶과 책속의 주인공들이 새드 앤딩으로 끝나는 것과 다른 이유라 할 수 있겠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선택이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택은 언제나 내가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내리는 것이다. 내가 하는 선택이 오늘의 자아뿐 아니라 내일의 자아에도 영향을 끼친다면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 점이 바로 결혼이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이유다." 

보부아르는 내가 늘 말하고 다녔던 선택에 대해 말한다.

내 입을 통해 이야기로 전해지는 말들이 개념으로 정의되어지는 순간은 묘한 감정과 후회를 느끼게 해준다. 페미니즘을 좀 더 빨리 접했더라면 난 아마도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

해도 내 인생을 걸어 후회하지 않을 신중함을 가지고 했을 것이다.

결혼을 단지 돌파구로만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 선택마다 내 자아를 생각했으리라. 

아마도 나를 잘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당시 나를 낮추고 다른 이를 배려하는 것이 여성의 삶이라 생각했기에 난 나에게 너무도 무심하고 나쁜 사람이었다.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기다린 아이였지만 주인공에게는 갑자스럽게 다가온 아이였다.

하지만 역시 육아는 똑같은 것 같다.

시끄럽고 무한반복 배려와 애정을 줘야 하며 내 자신을 점점 사라지게 만드는 동시에 나를 시험하고 변화시킨다.

레이철 커스크는 [생명의 작업]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어머니가 된 후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는 결코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은 '나'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상원이는 4살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녔고 난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은 상원이가 3학년이 되던 해에 그만두었다.

매일같이 빈집에 들어가 혼자 벽을 보고 생활해야 했던 상원이에게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처럼 프리랜서를 선택했고 상원이가 필요할 때마다 곁에 있어주는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동안의 엄마 자리의 결핍으로 힘들어했을 상원이를 더 이상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의 말처럼

 "부모 노릇이란 시도 때도 없이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소소한 분노와 좌절감의 폭발을 다스려가며 나 자신에 대한 책임과 아이에 대한 책임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끊임없이 찾는 과정이었다."

아이가 주는 행복감은 아마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삶을 이어가게 하는 목적이 되었다. 반면 육아의 과정은 나에게 버겁고 때론 지긋지긋하다는 말처럼 안 하고 싶고 내 자신이 그리워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머니로서 나는 매일 반복적으로 이렇듯 분열된 상태로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마지막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얘기하고 싶다.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억압적인 것은 '남자'가 아니며 페미니즘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버틀러의 말처럼 세상이 오로지 남자와 여자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구조화된 시각은 성별에 따라 틀에 박힌 신체적 행동을 모방하도록 만들어 성차별을 강화한다. 버틀러는 성별이 사회적. 심리적 역할을 의미한다는 기존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페미니스트들이 불변의 생물학적 특징으로 여긴 성 또한 사회적으로 구조화된다는 대담한 주장을 내놓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버틀러 이론을 접하고 나서 그녀의 이론에 동의하였다.


"우리는 여자와 남자,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였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결국에는 그냥 우리 두 사람, 스테퍼니와 존이었다." 


주인공의 깨달음처럼 나에게 삶이란 여자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서재현'이란 이름을 가진 내가 삶을 살아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과 육아를 통해 나는 역할들을 수행하기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역할이 아닌 내가 경험해낸 것들이 나를 설명해주길 바랬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삶의 어디에든 선택은 있다. 다만 문화적, 생물학적 특성으로 강요된 삶이 아닌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H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정체성은 지식의 주체가 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존재란 과정, 이야기, 대화입니다. 항상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세요." 

뻔하디 뻔한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탓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이 말은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지금 나에겐 나의 이야기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2015년 1월 18일 오후 12시 33분 한 달간의 독서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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