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에 겐자부로를 떠올리며
어릴 적 난 눈물이 많았다. 속상할 땐 훌쩍이면서 학교 구석에 서있는 나무를 찾아가곤 했다. 내 몸통의 몇 배나 되는 플라타너스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갈 때마다 나를 안아주고 만져주고 마음으로 달래주었다.
일본이 핵 폐수를 태평양에 퍼붓기 시작한 날, 난 오에 겐자부로가 쓴 '나의 나무 아래서'를 떠올렸고 예전에 쓴 칼럼에까지 생각이 닿았다. 출고 날짜가 2012년 2월 13일.
[유레카] 오에 겐자부로/ 2012-02-13
“어릴 때 낚싯바늘에 걸린 작은 물고기가 바동거리는 걸 봤다.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게 나를 소설가로 만든 첫 자극제였다.”(<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16인의 반란자>, 2011)
어린 생명들은 늘 오에 겐자부로를 울렸다. 어린것들이 살기 위해 꿈틀거릴 때, 내가 왜 이를 악물고 강해져야 하는지를 알았다고 했다. 그의 아이가 그랬다. 첫아이는 뇌헤르니아라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뇌가 두개골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의사는 수술을 받더라도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고, 아이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부모나 아이를 위해서 나은 선택이라고도 했다. 그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아이는 맑은 눈을 깜빡였다. 아이는 살아났고 그로부터 50년, 그 아이는 지금 작곡가의 삶을 살고 있다.
“아이에게는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 아이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라는 것은 정말로 소중합니다. 어른에겐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기다려 보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아이들에겐 전부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나의 나무 아래서>, 2001년)
여든을 바라보는 아이의 아버지는 지난 11일 도쿄 한 공원, 1만 명의 군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제 우린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려 합니다. 어른들이 미래의 아이들이 가져야 할 날들을 훔쳐가면 안 됩니다. 원전을 폐기하세요. 당장.” 많은 시민들이 아이들을 안거나 손을 잡고 있었다. 외신들은 ‘착하고 조용한’ 일본 국민이 거리를 점령한 이색적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일본의 바다 건너 나라는 아직 원전을 돈으로만 읽는다.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딱지 아래 원전 수는 20년 안에 대놓고 두 배(40개)가 될 것이고, 차세대 대표 수출산업이란 상표를 달고 지구 어딘가에 보란 듯이 재앙의 씨앗을 심고 있을 것이다.
무력하기만 했던 10여 년의 무게.
가혹하게 펼쳐지는 이 황폐한 풍경 앞에서,
난 이미 베어지고 없어졌을 '나의 나무'를 호명하며,
식어가는 내 마음의 톱밥 난로에
눈물 한 줌 던져주었다.
* 마지막 세 줄은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문구를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