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그람의 고추가루
두 달 전,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남은 건… 고추나무 50그루였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늘 채소 걱정이 없었다. 해마다 보내주신 고춧가루, 마늘, 배추, 여러 반찬 등등. 그 손맛 덕분에 냉장고는 항상 풍성했다. 어머니는 농사 베테랑이었다. 손대는 작물마다 풍년이었고, 배추는 알이 꽉 차고, 마늘은 통통했다. 고구마는 달콤해서 겨울내 간식이 되었고, 옥수수는 쫄깃쫄깃 얼마나 맛있던지! 어머니 손길이 닿은 밭은 마치 초록빛 예술작품 같았다. 밭마다 구획 정리가 딱딱 되어 있어 사시사철 초록이 넘쳤다.
어머니의 빈자리, 시들어가는 밭
그러던 어머니가 올봄부터 아프기 시작하셨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으니 밭도 시들었다. 자라던 채소들은 잡초에 묻혀버렸고, 그 푸른 예술작품 같던 밭은 어느새 황폐해졌다. 다행히 어머니가 아프시기 직전 심어둔 고추모종 50개가 살아 있었다. 덩그러니 남은 고추들만 잡초 사이에 간신히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료도, 농약도 없이, 풀도 매지 않으니 고추는 작고 벌레가 잔뜩 먹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고추나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냥 못 본 척하기엔 어머니가 남기신 마지막 식물이라 마음에 걸렸고, 수확을 하자니 고추 몇 그루 때문에 거제도까지 왕복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돈으로 따지면 별것 아니지만, 어머니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니 다시는 먹을 수 없는 귀한 고추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수확하자!"
고추 수확, 그리고 고생길의 시작
그렇게 주말마다 아무도 없는 시댁에 가서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고추를 딸 때 마다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야야 야무지게 해라" 벌레 먹은 건 버리고, 작아도 야무지게 익은 고추들을 하나하나 따서 부산으로 실어 날랐다. 처음엔 친정엄마 집에 가져다 드렸는데, 엄마는 빌라 옥상에서 고추를 말리셨다. 그런데 도시에서 고추를 처음 말리다 보니 온갖 사고가 일어났다. 불볕더위에 고추가 새카맣게 타버리질 않나, 갑작스런 소나기에 고추가 물에 푹 젖어버리질 않나. 옥상까지 들어 옮기고 내리고 고추를 말리기 위한 엄마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남편은 고추를 우리 집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하지만 동향 아파트에 아침 햇살 몇 시간 잠깐 비추는 정도로는 고추가 제대로 마를 리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지나도 고추는 눅눅했다.
고추말리기 프로젝트, 드디어 완성!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식품 건조기를 사 왔다. "이젠 집에서라도 제대로 말려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고추 말리기 대작전이 시작되었다. 종일 건조기를 돌리니 집안 가득 매운 냄새가 진동했다. 그걸 며칠 동안 반복해서야 드디어 모든 고추가 말랐다.
이제 마지막 단계! 남편과 함께 믹서기에 고추를 넣고 갈았다. 그렇게 완성된 건 딱 300g의 고운 고춧가루.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기신 귀한 유산, 금싸라기같은 고추가루가 탄생했다.
이 귀한 고춧가루, 어떻게 먹을까?
그렇게 완성된 고춧가루를 보고 나니 고민이 생겼다.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할까? 그냥 아무 음식에 막 쓸 수는 없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품인데, 귀하게 써야 한다. 어떤 특별한 날, 가족이 모일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에 살짝 넣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고추가루를 쓰면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의 손맛이 다시 식탁 위에 살아날 것 같다.
아니면 조금씩 나눠서 가족들과 함께 나눌까?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는 것도 어머니께서 기뻐하실 것 같고.
어느 쪽이든, 그 300g의 고추가루는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이자, 우리 가족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