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치료와 독서로 이어진 35년의 우정

by 별빛소정

35년 전, 풋풋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인연은 졸업 후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잠시 멈추는 듯했다. 결혼과 출산, 치열한 일상 속에서 한동안 서로의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몇 년 전부터 네 명의 친구들은 다시 끈끈한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특별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좋은 계절엔 가까운 산으로 트레킹을 다녀오기도 하지만, 그저 오랜 친구들과 나누는 소소한 수다만으로도 마음 깊이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이를 ‘수다치료’라 부른다. 삶의 구석구석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아낌없이 풀어놓으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올해부터 우리의 모임에 특별한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바로 독서모임이다. 각자의 인생 이야기에 책 이야기를 더하니, 우리의 '수다치료'는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졌다. 이번 달, 우리가 함께 읽은 책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다.

"20대 때 읽었던 느낌보다 지금 다시 읽으니 새로운 면이 와닿는 것 같아. 노인이 물고기 잡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소년과의 우정 이야기가 더 깊게 다가오더라." 친구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온갖 고난을 다 겪으며 청새치를 잡았지만 결국 상어한테 다 뜯기잖아.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았어. 우리 인생도 어느 순간에는 기를 쓰고 붙잡았던 걸 내려놓아야 비로소 평화가 오겠지."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이 흘렀다.


"이 짧은 소설에 우리의 인생이 들어있는 것 같아. 84일 동안 고기를 못 잡아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준비하는 성실함. 어마어마한 행운 뒤에 찾아오는 상실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 말이야.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 책을 읽으며 배운 것 같아." 문학적인 통찰을 나누는 시간은 우리의 대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꾸밈없는 문체가 오히려 더 깊게 울림을 주듯이 우리의 대화도 투명하게 서로의 마음을 건드렸다.


친구들은 『노인과 바다』에 빗대어 저마다의 인생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3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의 성장을 지켜본 친구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속에 아직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이 숨어 있었다. 책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 해를 보내는 소회로 이어졌다.


"올해는 일하는 현장이 부산이랑 가깝고, 아들 학교 덕분에 집을 부산에 하나 더 구할 수 있어서 친구들도 만나고 가족 행사에도 참가하며 마음의 안정이 되었던 것 같아. 내년에는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주변 정리와 비우기를 하고 싶어."

"올해 명예퇴직을 하고 30여 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어. 나의 원래 꿈이 가정주부였거든. 탁구도 하고 PT도 받고 그림도 그리며 요즘 나의 꿈이 이루어진 것 같은 삶을 살고 있어. 수입은 반으로 줄었지만 절약해서 살아지더라고. 올해 성당 레지오 활동에 가입했는데, 내년에는 신앙생활에 집중하면서 봉사활동을 하며 나누는 삶을 살고 싶어."

"나는 올해 양산으로 이사를 하고 동생들과 함께 살게 되었어. 동생들과 매일 밥을 차려 먹으며 건강해진 것 같아. 동생 일도 돕고 매일 부산으로 출근하니 일거리가 3배로 늘었지만, 사업도 더 늘고 번창하게 되었지. 이대로 안정되게 살아가고 싶어."


올해는 친구들에게 많은 삶의 변화가 있었다. 30년 공무원 생활을 명예퇴직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친구, 동생들과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삶을 시작한 친구도 있다. 남편과 함께 바쁜 현장의 삶을 살아가는 친구도 있다. 무엇보다 올 한 해 우리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고, 때로는 자극을 받기도 했다는 고백들이 이어졌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다들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너희들 주려고 샀어"라며 롤케이크를 꺼내고, 한 친구는 브라우니 쿠키를, 다른 친구는 재생크림을 꺼내 주었다. 연말을 맞아 각자 정성껏 선물을 준비해 온 것이다. 나 역시 베트남에서 사 온 에코백과 미리 신청받은 책 10권가량을 가져가 나누어 주었다. 미리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연말의 온기를 나누고 싶어 준비한 마음들이 테이블 위로 풍요롭게 쌓였다.


“내가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나는 운이 좋다’고 말하면 정말 운이 좋아진대. 우리 내년에는 더 운이 좋을 거야.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길 바라.”


서로의 인생을 축복하며 받은 온기를 가슴 깊이 새겼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노인이 거친 바다에서 돌아와 사자 꿈을 꾸며 잠들 수 있었던 건, 그를 믿어주는 소년이 곁에 있었기 때문임을. 우리 역시 삶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때로는 청새치를 잃고 빈 배로 돌아올지라도, 서로의 수다와 온기가 있는 한 결코 빈손이 아니다. 인생의 맛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익어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겨울바람 속에서도 따스한 여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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