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마지막 밤, 나는 경건하게 돼지등뼈를 씻었다. 핏물을 빼고, 초벌 삶기를 하고, 시래기와 묵은지를 투하해 푹 고아냈다. 이름하여 '감자 없는 감자탕'. 내 생애 최초의 도전이었다.
한 그릇 듬뿍 떠서 남편과 식탁에 앉으니 TV에선 보신각 종소리가 댕그렁거린다. 하필 그 엄숙한 시간에 감자탕이었을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끓여보고 싶어서 끓였고, 마침 그날이 새해 첫날이었을 뿐이다. 등뼈를 양손에 들고 쪽쪽 빨고 있는데 아나운서가 묻는다. "자, 여러분의 새해 소원은 무엇입니까?"
나는 당황해서 입가로 흘러내리는 국물을 손등으로 쓱 훔치며 중얼거렸다. "음... 뭐 하지... 부자... 그래, 돈이 최고지! 부자 되게 해 주세요!" 기름 묻은 입술로 외친 소망이라니, 참으로 세속적이고 맛깔난 새해의 시작이었다. 야식으로 부푼 배를 안고 새벽까지 뒤척였다. 해돋이? 그런 건 부지런한 분들의 몫이다. 나는 그저 남은 감자탕이나 데워 먹으며 뒹굴거릴 생각뿐이었다. 문득, 새해 계획을 세우기 전에 지나온 1년을 제대로 평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2025년에 뭐 했더라?' 떠올려보니 내 곁엔 '브런치스토리'가 있었다. 이제 내게 브런치는 아침과 점심 사이의 빵조각이 아니다. 화장실 갈 때마다 휴대폰을 붙들고 울고 웃게 만드는 최애 공간이자, 만원 지하철에서 나를 숨 쉬게 하는 산소호흡기였다. 온갖 작가들의 은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대나무숲. 정보검색을 위해 네이버보다 브런치를 먼저 찾는 '브런치 중독자'인 나에게, 브런치를 뺀 2025년은 그야말로 바람 없는 윈드서핑이었다.
사실 나는 알아주는 '팔랑귀'에 '냄비근성'의 소유자다. 남들 하는 건 다 따라 해 봐야 직성이 풀린다. 뜨개질, 빵 만들기, 식물 집사, 골프, 수영, 스피닝... 수많은 것들이 내 열정에 데었다가 금방 식어버렸다. 그런 내가 2025년 초, 독서모임에서 남들 따라 '꾸준함'이라는 원워드(One Word)를 정해버린 것이다. 줏대 없고 남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꾸준함이라니 만들어 놓고도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냄비근성으로 시작했는데, 이 냄비가 식지를 않은 거다. 결과를 나열해 보니 나조차 믿기지 않는다. 1년 동안 75권의 책을 읽었고, 4개의 독서모임에 소속되어 월 5회 독서모임에 참가했다. 323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괴테와 니체의 문장을 필사했다. 공저로 책도 냈고, 무려 294개의 브런치 글을 썼다. 정신을 차려보니 팔로워는 655명, 브런치 10주년 작가의 꿈 공모전 당선에 이어 연말에는 브런치 메인, 오늘의 작가로 이름까지 올렸다.
브런치는 나에게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선물했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11월엔 글태기가 와서 한 달간 브런치를 멀리했더니, 세상과 소원해진 것처럼 쓸쓸했다. 사실 글감은 늘 있지만 쓰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게으름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뇌를 쇼츠(Shorts) 영상에 담가 굳혀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글을 쓴다. 내가 누군가의 글로 위로받았듯, 나의 글도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철학가의 문장을 베껴서 실제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르지만 아는 척과 잘난 척을 잘도 버무려 낸다.
이제 2026년의 문이 열렸다. 감자탕으로 시작했으니, 새해의 포부도 감자탕으로 가보려 한다. 돼지등뼈의 녹진한 기름맛, 우거지의 부드러움, 된장과 마늘, 고춧가루, 설탕, 파, 액젓, 다시다에 온갖 양념을 다 때려 부어 얼큰하고 달콤하고 부르럽게 녹아나는 한 해를 만들고 싶다. 끓이면 끓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 고기인지 야채인지 양념인지 모르게 모두를 품어주는 그런 녹진한 한 해 말이다.
연말에 친구가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누군가에게 편안한 휴식이었는지, 어둠을 밝히는 다정한 등대였는지 자문해 봅니다." 나도 자문해 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어준 적이 있었나. 누군가의 외로움을 밝혀준 적이 있었나.
2025년 마지막 날 괴테는 내게 속삭였다. "자신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일에 성급하게 도전하지 말라"라고. 등대니 휴식이니, 그런 거창한 건 모르겠다. 나는 그저 추운 날, 누군가에게 얼큰하게 속이나 달래주는 뜨끈한 감자탕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만든 감자탕을 맛본 남편이 "이거 파는 것보다 맛있다!"며 극찬을 쏟아냈다. 세상 그 어떤 문학상보다 남편의 "맛있다" 한마디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 되어 올해 주제를 감자탕으로 정하고 말았다.
올 한 해, 인생이라는 솥에 나만의 양념을 때려 넣고 푹 고아보아야겠다. 적토마처럼 달리든, 거북이처럼 걷든 상관없다. 결국 우리 인생은 마지막에 '진국'이면 장땡이니까. 자, 일단 남은 감자탕 국물에 밥부터 볶고 시작하자. 적토마야, 달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