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백수 월차 날
백수 3총사 비밀결사단 창단
퇴근 후 집에 들어서니, 남편이 초저녁부터 침대에 누워 있다. 평소 주식 공부하느라 새벽 1-2시까지 잠도 미루는 사람이 이른 시간부터 자리에 눕다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왜? 어디 아파?”
“아니, 내일 그날이잖아.”
"그날? 아, 그날!"
남편이 한 달 내내 설레며 기다리는 바로 그날이 내일이다. 바로 ‘백수 3총사’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남편과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떠난 옛 직장 동료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백수 3총사 비밀결사단’. 이들은 매달 한 번, 꼭 이 날만큼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난다. 이 모임의 철칙은 단 하나, 멤버 중 어느 누구도 새 직장을 잡지 말 것! 어쩐지 서로 눈치를 주며 은근히 경계하는 듯도 하다. 새 직장을 잡으면 이 특별한 모임이 깨질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시간은 많고 부지런함을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은 내일 새벽 3시에 만나기로 했단다. 새벽부터 모여 낚시도 하고, 잡은 생선으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끓여 먹는다. 거기다 1박 2일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이다. '대체 뭘 하길래 밤새 놀지?' 하는 의문은 있지만, 사실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이들은 허심탄회하게 백수의 일상에 대해 정보 교류를 하고, 세상 시름을 털어놓으며 시간을 보내겠지. 마누라한테 받는 눈칫밥 설움도 토로하면서.
이들이 30년간의 직장생활에서 몸에 밴 것은 지나친 부지런함이다. 이 날을 위해 한 달 동안 세부 계획도 짜는 듯하다. 어떤 바쁜 일정이 생기더라도 그날은 꼭 비워둔다. 백수 3총사가 골프를 치기로 한 날은 집에서 1시간 반 거리인 골프장에 새벽 6시 티 예약을 한다. 그럼 집에서 3시에는 일어나 준비하고 4시에는 나가야 한다.
모임에서 돌아오면 남편은 할 말이 많다. 누구는 테니스를 시작했단다. 누구는 수영을 시작했단다. 당뇨가 생겼다더라. 나는 궁금하지도 않은 백수 3총사의 근황을 나에게 자세히 말해준다. 덧붙여 누가 제일 먼저 물고기를 잡는지 1만 원 내기를 했는데, 본인이 1등 했단다. 백수 3총사 중에 본인이 최고라고 기세가 등등하다. 골프를 쳐도 본인이 항상 1등이라고 자랑한다.
"그래 어디서건 최고면 좋지요"
매일 똑같은 일정을 보내는 남편에게 이 날은 그저 하루가 아니라 ‘백수 월차’나 다름없다. 직장에서 월차를 받는 것처럼 평소의 루틴에서 벗어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꽉 찬 일정으로 동료들과의 시간을 즐긴다. 나도 그가 얼마나 이 시간을 기다려 왔는지 잘 알고 있기에 이 날만큼은 뭘 하는지 따로 묻지 않는다. 백수라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 한 달에 한 번쯤은 특별한 휴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날은 남편에게 전화도 걸지 않는다. 나만의 작은 배려랄까. 그의 행복한 휴가를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월차에서 돌아오면 남편은 더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국민체조도 더 열심히 하고 주식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지금 하고 있는 고추대작전도 열심히 치를 것이다.
내일은 나도 월차를 내야겠다. 오랜만에 남편 없이 나만의 느긋한 시간을 가져보기로 마음먹는다. 어쩌면 내게도 이 시간이 작은 휴가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백수 동지들과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고, 나는 남편 없는 평화로운 나만의 시간을 즐기며 각자의 방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일이 기대된다. 이렇게 서로의 휴가를 응원하며 보내다 보면, 다시 일상에 돌아와도 마음은 훨씬 넉넉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