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에 푹 빠져 있다. 이름하여 ‘가루 프로젝트’. 남편은 시간이 많고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집안에서 뭔가를 실험하고 연구하는 데 열심이다. 그가 이번에는 “말리고 부수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루 프로젝트의 첫발: 고춧가루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5만 원을 요구했다. 이유인즉, 야채 건조기가 필요하단다. 건조기를 장만한 그는 시골에서 따온 빨간 고추를 말리기 시작했다. 베란다에서 고추가 잘 마르지 않아 고심하던 남편에게 건조기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농약 한 번 치지 않은, 손가락보다 작은 고추는 건조 후 더욱 매운맛을 자랑했다. 믹서기로 갈아 만든 고춧가루는 우리 집 매운 양념으로 대활약 중이다.
성공의 기쁨에 취한 남편은 냉장고를 열어보며 “다음 가루는 무엇을 만들까?” 눈빛을 반짝였다.
‘다시 가루’로 국물 혁명
남편의 특기는 된장찌개다.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는 우리 집만의 따뜻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매번 멸치나 조개로 국물을 내는 과정이 번거로웠던 남편은 마른 멸치와 새우를 갈아 ‘다시 가루’를 만들었다. 이 가루 한 스푼이면 된장찌개, 김치찌개, 미역국, 만둣국 등 어떤 국물 요리도 손쉽게 완성! 국물 내는 번거로움 없이 맛도 좋고 간편한 덕에 우리 집의 필수템이 되었다.
만능 맛가루, 어디든지 OK
다시 가루의 성공에 고무된 남편은 더 다양한 가루를 만들고 싶어졌다. 이름은 ‘만능 맛가루’. 멸치, 다시마, 황태, 버섯, 호박, 파, 마늘 등 온갖 재료를 말려 가루로 만든 이 양념은 그야말로 만능이었다. 무침, 볶음, 찌개 등 어디에 넣어도 깊은 맛을 더해주는 비밀 병기. "MSG처럼 확연히 다르진 않아도, 있는 듯 없는 듯 깊은 맛"이라는 그의 설명에 맛도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건강까지 챙기는 고춧잎 가루
어느 날, 남편은 고춧잎이 당뇨와 관절 건강에 좋다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니, 시골에서 고춧잎을 잔뜩 따왔다. 그리고는 또 건조기에 돌려 가루로 만들었다. 이 고춧잎 가루를 밥에 넣으면 초록빛 밥이 완성된다. 덕분에 우리는 맛있는 하얀 쌀밥 대신 맛없어 보이는 초록밥을 먹으며 남편의 건강 프로젝트를 응원 중이다. 먹을 때마다 입맛이 떨어지는 덕분에 다이어트 효과도 만점이다.
단맛의 혁명: 건강한 단맛 가루
남편의 최신작은 ‘단맛 가루’다. 당뇨기가 있어 설탕을 꺼리는 그는 설탕 없이 단맛을 낼 방법을 고민했다. 요즘 가정요리사로 요리 유튜브를 자주 시청하다 보니 설탕이 맛을 내는데 중요한 재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파, 양배추, 사과, 단감, 고구마 같은 단맛 나는 과일과 채소를 말려 가루로 만든 것이다. 이 가루는 설탕처럼 직접적인 단맛은 아니지만 은은한 단맛을 낸다. 맛이 달달하다 보니 요리보다 숟가락으로 퍼먹는 양이 더 많은 게 문제다.
프로젝트 정신으로 빚은 삶의 재미
남편은 곶감 프로젝트, 고추 프로젝트, 냉동 프로젝트에 이어 이번 가루 프로젝트까지 연구하고 실험하는데 매진하고 있다. 공대 출신 엔지니어다운 그의 연구 정신은 집안일에도 발휘되어 모든 것을 프로젝트처럼 추진한다. 때로는 그의 실험 정신이 과한 것 같지만, 뭐든 재미있게 해 보려는 그 열정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의 가루 프로젝트는 단순히 음식 만드는 것을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재미를 보여주는 것 같다. "다음 프로젝트는 뭘까?" 그의 도전은 늘 기대를 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