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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Apr 24. 2023

사람의 일

<<미래과거시제>> 중 <수요곡선 수호자>를 읽고

충격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그 힘으로 순환이 빨라진 혈액 탓인지 열감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첫 단편 <수요곡선의 수호자>가 이럴진대,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들은 또 어떨까? 흥분된다!


작년 가을, 내가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해오름 평생교육 교사회에서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미래사회를 주제로 3차시 강의를 준비했었다. 그중 하나가 SF동화였는데, 그날 한 선생님의 질문이 오랫동안 마음에 머물렀었다. 미래를 배경이나 소재로만 사용하고 현재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SF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작가와 독자는 현재에 속한 존재이므로 혹은 현재의 시각으로 미래를 예측하므로 또 현재의 문제와 미래는 이어져 있으므로... 이런저런 이유들을 떠올리다 잊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며 두둥실, 생각은 몸집을 키우며 다시 존재를 드러냈다.


SF 소설들은 미래 사회를 상상해 설명하고 묘사한다. 당연히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현재의 요소가 미래의 모습에 영향을 미칠 텐데, 가끔 SF 속 미래가 늘 고정되고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느낌이 든다. 상상력. 하지만 상상력 또한 현재의 것을 요리조리 운용하면서 생겨나는 것 아닐까? 문득 작년, 그 질문이 여전히 마음에 남은 이유는 오히려 현재의 문제를 진정으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배명훈 작가의 <<미래과거시제>>에 실린 단편들을 만났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격리와 거리 두기가 일상으로 자리 잡은 사회적 변화가 미래 인류의 삶에 어떻게 흔적을 남겼는지 상상한다. 이처럼 미래는 과거와 철저히 연동된다. 미래는 현재로부터 상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 사실을 잊는 듯하다.


<수요곡선의 수호자>는 가슴을 뛰게 했다. 우리 모두 고민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초연결 초지능을 특징으로 하는 시대, AI와 함께 살아갈 바로 그 시대에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인간의 일'에 관해 다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인간에게 주로 주어졌던 소비를 로봇에게 넘겼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던 감상과 감동을 로봇에게 넘겼다. 그래도 될까?


인간은 자신의 일을 AI에게 빼앗길까 두렵다. AI에게 노동은 맡기고 여가를 즐기라는 말도 두렵다. 여가를 즐기는 것으로 세상을 운영하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계속 부여받을 수 있을지 두렵다. 그렇다고 주 69시간씩 먹고살기 위해 일만 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단지 시간의 문제만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계속하고 싶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요는 공급에 영향을 미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수요공급곡선을 완벽히 구현해 내리라 믿는 이는 없다. 완전자유경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려면 인지하고 있어야 할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일은 그 사람의 역량과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예술뿐 아니라 모든 일은 다 그러하다. 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나의 일'을 인정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먹고살 수 있게 해 줌과 동시에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진짜 사람의 일은 수요가 필요하다.


그런데, 세상에. 소비로봇이라니. <수요곡선의 수호자>에 등장하는 마사로는 소비로봇이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해 낸 물건들에게는 감동받지 않는다. 유일무이한 공연, 그림... 인간들이 열망을 담아 만들어낸 것들에 감동하고 비용을 지불한다. 왜 우리는 로봇을 생산자로만 생각했을까? 왜 로봇의 지위를 생산자로만 한정해 그들과의 경쟁에서 설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했을까? 사람이 만든 것을 로봇 따위가 소비하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못마땅했던 것일까? 마로를 파괴하려 결탁하는 과잉 생산자들처럼 소규모 생산자가 갖는 힘을 없애려는 세력이 있어서일까?


솔직하게 말하면 내 입장은 마사로의 역할을 사람이 해야 한다는 쪽이다. 현재든 미래든.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마사로처럼 소비하지 않는다. 과정에 감동받고 가능성에 환호하고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결과에 감동받고 현재의 성공에 환호하고 비용을 지불한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때 공적자금을 소규모 예술 단체 지원금이 아니라 티켓구입비로 써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다. 단체들의 자생력을 높이기 위해서, 지원한 단체의 성격에 맞춰 내용을 준비하게 되는 자기 검열에 빠지지 않도록... 그래서 더더욱 배명훈 작가의 상상력에 소름이 돋았다. 정부가, 사람들이 이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잘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등장할 수밖에... 잘 프로그래밍된 우리 마로는 실은, 사람의 일, 사람의 가치를 높이는 공급 곡선 수호자였지 말이다.


고래 떼에 둘러싸인 채 발견된 마로, 갱신된 카드에 결제한도를 잔뜩 늘려 다시 깨어난 마사로에게 유희는 말한다. "마로, 이제 가서 세상을 구해." 마사로는 세상을, 인간을 구할 수 있을까?


마사로를 생각하다 나는 카드를 들고 교습소를 나섰다.

교습소 옆에 새로 생긴 작은 공방에서 그림 1회 수강권을 결제한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댄다.

나의 일이 가치롭듯 네 일이 가치로움을 생각할게.

마사로가 홀린 듯 바라보던 유희의 명상을 응원할게.

그저 두 시간, 내가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 희열을 느껴볼게.

내가 수호해야 할 가치로운 사람의 일을 기억할게.

이렇게 나는 작가 배명훈에게, 미래에서 온 유희와 마사로에게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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