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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Jun 10. 2023

내 마음을 빼앗아간 그녀


1988년은 여러모로 시끌벅적했던 해였다. 그해 2월 직선제 대통령 선거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고 9월에는 올림픽 열기로 또 한 번 온 나라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나에게 1988년은 책받침 코팅으로 고이 간직했던 가수 이상은으로 기억되는 해이다.


그전까지 가수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중학교 소풍 때 학교마다 하나씩 있다는 소방차 공연이 있어도 시큰둥했었다. 한밤중에 라디오를 끼고 앉아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공테이프에 녹음을 하고 알록달록하게 그림으로 꾸민 엽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 목적은 노래나 가수가 아니라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러던 내가 그녀, 이상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담다디'로 혜성처럼 나타난 그녀는, 놀라움이었다. 여성 가수가 그처럼 짧은 머리로 바지를 입고 긴 다리로 껑충대며 노래를 하다니. 음악적 재능을 위주로 평가하던 기존 음악 시장에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캐릭터였음이 틀림없었다. 중성적 이미지 때문에 담다디를 부르는 이상은을 좋아한다 분석한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실은 그 시절 '자유'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이상은으로 대신 채웠던 듯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어른들과 음악을 좀 안다는 아이들에게 이상은의 음악을 폄하하는 이야기들도 종종 흘러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어서 발표한 '사랑해 사랑해' '해피버스데이투유'까지 종일 따라 불렀다. 갑작스러운 장르 변화로 사람들이 실망했다는 기사가 실렸지만 아름다운 곡조를 들어보지 않고 쓴 기사가 틀림없다 믿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사라졌다. 유학을 갔다 했다. 문방구에는 여전히 그녀의 책받침 코팅과 연습장들이 즐비했는데, 인기 절정의 그녀가 한국을 떠나버렸다. 나는 크게 실망하고 슬퍼했지만, 곧 학력고사를 봤고 대학을 갔고 그녀를 잊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 이상은을 만났다. 이상은이 돌아왔다. '공무도하가'. 낯설었다. 나의 음악적 감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곡이었다. 하지만 그 곡은 노래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공부하고 변화하는 이상은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던 듯하다. 대중들이 원하는 이미지로 만들어진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으며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걷고 있는 진짜 예술가로 느껴졌다. 반가웠고, 뭔가 마음이 그득해졌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중이었어.' 그해 8월, 5년 반 만에 학교를 졸업하고 뒤늦게 후배들 사이에 끼어 약사 국가고시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자긍심과 불안 사이에서 잠시 흔들리던 시간을 이상은의 '공무도하가'가 붙잡아 세워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비밀의 화원'을 통해서였다. 좋았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연인을 향한 노래일 수도 친구를 향한 우정일 수도 자신의 아이를 향한 다짐일 수도 있는 노래. 가사도 마음에 들었지만 뭔가 삐걱거리는 듯한 음정이 참 좋았다. 음반이 발매되고 한참 후에 처음 들은 거라 아이 셋과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 부모 노릇은 처음이라 매일 반성과 후회를 되풀이하던 30대였고, 누군가 덤비기만 하면 언제든 싸워주리라 날이 서있던 30대였다. 그런 내게 노래는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며 위로해 주었고 다시 밥을 먹고 힘을 내고 꿈을 꾸고 행복해지리라는 마음을 갖게 했다. 참 감사한 노래다. 요즘도 혼자 있을 때면 종종 흥얼거리곤 하는데, 듣기에 따라 화자의 비주체적 태도를 문제 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비스듬히 기대어 힘을 주고 힘을 받으며 산다는 건 무엇보다 귀한 인간의 마음이라 여기는 나는, 뭐 그저 좋다.


물론 나는 이상은에게 늘 마음을 주고 있는 열혈 팬은 아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던 노래를 들으며 "이 노래가 이상은 노래였어?" 하고 뒤늦게 놀라기도 하고 새로 나온 노래를 다 찾아 듣지도 않는다. '삶은 여행' '넌 아름다워' 'Bliss' 영화를 보다가, 블로그 삽입곡으로 생각지 않았던 곳에서, 우연히 만나면 친구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여전히 자신의 길을 자신의 색깔대로 묵묵히 즐기며 걸어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응원한다.

어쩌면 그녀의 노래를 좋아한다기보다 그 시절 내 모습을 안쓰러워하거나 혹은 자랑스러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녀에게 보내는 응원이, 나에게 보내는 응원인 셈이다. 그래서 더 고마운 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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