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나는 역대급으로 돌아다닌 것 같다.
일주일에 하루밖에 없는 휴무에도 불구하고 누가 집에서 쫓아내기라도 하는 듯, 시간이 나는 족족 그곳이 어디든 떠났다.
지나고 보니 딱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넘치게 좋았던 곳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단 도피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시간들이었다.
기나긴 도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가을이었다.
간만에 가을비가 걷히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오늘은 아무런 약속도, 계획도 없는 날이었다.
좋았다. 누구를 만나거나 어디를 가야 할 일이 없으니 홀가분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동안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나를 못살게 군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눈이 일찍 떠졌기에 잠시 넋을 놓고 베란다 바깥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그 새 많이도 자란 화분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이었다.
최근 철저히 옅어졌던 잠을 오늘 하루 몰아서 잔 마냥 깊게 자고 일어난 늦은 오후,
가을이 되면 꺼내 바르는 화이트머스크향의 바디로션을 걸치고 요즘 자주 찾는 카페로 향했다.
커다란 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는 적당히 어두워진 오후와 밤 사이의 하늘,
얇은 가디건정도가 잘 어울리는 가을 초입의 온도,
도입부만 들어도 아는 좋아하는 노래가 잔잔하게 흩어지는 공간에서 생각했다.
혼자여도 나쁘지 않다고.
누군가에게 나의 불안이 보여질까 두려워서 괜찮은 척 해왔던 지난여름의 나는 괜찮지 않았고 늘 불안했으며, 그 불안은 결국 보였으리라.
하지만 보여지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온전한 나로서 행복하지 않다면 누군가를 끼워 넣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절절히 느꼈으니 되었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나에게 필요했음을 알았으니 되었다.
이번 가을은 유난히도 고요하게 지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