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미라곤 없는 것 같더니 세상 따수운 나라였네.
‘좀 도와주실래요?’
나는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게 어렵다. 고마워, 미안해 같은 말은 잘도 나오는데 도와달라는 말은 민망하다. 상대방이 거절을 표하며 미안해하면 어떤 표정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 안에서 맴도는 이 말은 언어가 다른 외국에서는 혀끝에도 안 맴돌고 쏙 들어가 버린다.
도움 청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떠난 유럽여행에서 복병을 만났다. 그 이름은 캐리어. 해외여행이 처음이라 친구에게 빌려 온 캐리어는 하필 제일 큰 사이즈였고 J가 가져온 캐리어는 무게만 19kg이라 어디에 올리고 내리는 것 자체가 난관이었다. 도와달라고 하고 싶지만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려고 낑낑거리는데 들려오는 ‘May I help you?’ 이런 고마울 때가! 잽싸게 ‘yes!’를 외쳤고 남자는 나와 J의 캐리어를 기차 짐칸에 올려줬다. 뜻하지 않게 만난 친절이 툭, 하고 마음에 닿은 순간이었다.
여행 내내 친절은 차곡차곡 쌓였는데, 그 무게가 캐리어만큼 무거웠던 나라도 있다. 첫인상은 뭐라고 콕, 집어낼 순 없는데 딱딱했다. 디폴트 값이 무표정인지 쉽게 웃지도 않지, 묻는 말에 딱! 대답만 해주지. 고맙다는 말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가 다다. 당시 운전면허가 없던 내가 봐도 어라? 싶을 만큼 역주행에 가까운 차의 움직임에도 경적 한번 안 울리고 차가 후진해서 다시 언덕길을 내려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던 차량들.
사람도, 건물도, 그들만의 규칙도 죄다 딱딱해서 ‘정나미라곤 없는 나라야.’ 싶었다. 확연한 선이 존재하는 느낌이라 낭만과 거리가 멀다 싶었는데 오래 볼수록 이 나라, 자꾸 좋아진다. 무표정한 얼굴 혹은 약간 미소 띤 얼굴로 자꾸 친절을 던져주던 나라, 독일.
독일에서 사람들이 여기저기 던지는 친절을 셀 수 없이 많이 받았다. 시작은 친구가 굴린 캐리어였다. 네덜란드에서부터 캐리어를 끌고, 들고, 옮긴 J의 체력과 인내심이 바닥을 친 날이었다. J는 캐리어가 부서져도 난 모르겠다며 캐리어를 내팽개쳤는데 경사가 져있던 탓에 캐리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 우리보다 빨리 할아버지 한 분이 급하게 뛰어와 굴러가던 캐리어를 붙잡아 주셨다. 덕분에 캐리어는 바퀴도, 몸통(?!)도 멀쩡했다.
숙소 근처 마트 계산대에서는 비닐봉지가 영어로 안 떠올랐다. 나는 허공에 대고 봉지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내 뒤에 계산을 기다리며 서있던 모두가 퀴즈 맞추듯이 유심히 내 손짓을 보더니 누군가 비닐봉지를 외쳤다. 아무도 짜증 내지 않고, 비닐봉지를 맞췄다는 사실에 미소 짓던 그들의 느긋함과 기다림은 독일과 낯가리던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오늘 날씨 좋죠! 햇빛도 쨍하고 피크닉 가기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네.’라고 대화를 끊어버릴 사람이 절반은 될 것 같은데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 기차역 아저씨도, 과일가게 아줌마도, 마트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도. 의사소통이 안 돼도 들어주려는 눈빛 한 번, 기다려줌 한 번에 나와 J는 여기서 살라면 살 수도 있겠다는 하늘을 찌를 자신감을 품고 쾰른, 본, 슈투트가르트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여행을 다녀와서 독일이 제일 좋다는 마음의 결론은 가득하게 쌓인 독일 사람들의 친절 때문이다. 무뚝뚝하지만 속은 참 따뜻하던 친절. 나와 J는 그 기억에 기대 또 독일 여행을 기획하고 있으니, 여행지의 풍경과 문화재만큼 사람의 영향이 크다 싶다.
여행했던 때를 떠올리면 우리를 도와줬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낯선 땅에서 여행자의 마음을 풀리게 만드는 마법 같은 친절. 공짜로 받은 친절이 내 안에만 고이면 썩는 법이라 되돌려주고 싶지만, 받은 사람에게 다이렉트로 줄 방법이 없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걸로 받은 친절을 되갚고 있는 중이다. 언제 다 갚을까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