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워와 영어공부
내가 근무하는 학원은 꽃 도매상가 근처에 위치해있다. 각종 꽃집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식물 볼 일이 많다. 수업하러 오시는 외부강사님도 화훼를 전공하셨다. 새로 오신 분이라 이력사항을 입력하려고 시스템에 접속했다. 해외 자격이라 플로랄 디자인을 영어로 입력해야 했다. 나는 자신 있게 한/영 키를 눌렀다.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플로랄 디자인. 꽃은 플라워. F...L....어? 다음이 O야 A야? 플ㄹ...버벅 거리다 플로랄 디자인(Floral Design)을 입력했다. 실소가 터졌다. 아무리 영어 쓸 일 없는 직종이고, 여행 안간지 한참 됐다고 하지만 플라워 스펠링을 헷갈리다니. 언어는 안 쓰는 만큼 잊는다더니 이 정도면 잊는 게 아니라 기억에서 영구삭제될 것 같다.
신년 목표는 영어다!
나는 올해 또 다이어리에 썼다. 영어공부라는 익숙하고 지겨운 단어를.
새해의 꽃은 신년 계획이고, 신년 계획의 꽃은 영어공부 아니면 운동 이런 거 아니겠나. 지겹도록 듣는데 막상 계획하고 하자면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은 그것. 영어공부 또는 영어회화를 신년 목표로 세운 지 5년이 넘었다. 본격적인 시작은 유럽여행이었다. 독일 공원을 한가롭게 거닐며 친구와 영어공부 의지를 불태웠다.
“이렇게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이 많은데 말을 못 거는 게 말이 되냐.”
“그러니까, 우리 전공 공부가 아니라 영어를 했어야 해. 전자레인지 몰라서 어제 그 난리 친 거 봐. 위잉 위잉 이랬다니까, 나.”
“나는 비닐봉지 몰라서 카운터 앞에서 마임 했다.”
한참 영어공부를 주제로 이야기 한 만큼 여행이 끝나면 열심히 공부할 줄 알았다. 한국 땅 밟는 순간, 휴학의 달콤함에 빠져 공부를 밀어냈다. 복학하고는 과제가 많아서, 취업해야 해서, 자격증 따려고 등등. 초라한 토익 성적만 가지고 졸업했다. 일을 시작하고는 더 쓸 일이 없어서 영어가 필요했던가? 가물가물해지기까지 했다.
I AM SHER LOCKED
그러다 영국 드라마 셜록을 만났다. 원래 누구 죽고, 때리고, 무서운 건 딱 질색인데 시즌1부터 정주행 했다.
I AM SHER LOCKED.
이 문장 안다면 셜록 덕후일 확률이 높다. 주인공이 잘생김을 연기한다는 드라마. 아무튼, 셜록을 시작으로 MMFD까지 영국 드라마를 주야장천 봤다. 전화영어 선생님이 영국식 표현이야, 그거.라는 말을 자주 하실 정도로. 파이팅 넘치던 시기는 드라마 정주행이 끝나면서 막을 내렸다.
디즈니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나왔을 때, 자막을 읽어야 한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영상에서 눈을 떼기 싫은데 자막을 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이 많이 볼 텐데 나는 어린이가 보는 애니메이션에도 자막이 필요했다. 디즈니에서 모아나가 나의 최애 캐릭터인데 그 예쁜 영상을 자막과 함께 본다는 게 짜증 났다. 그렇게 답답하고 짜증 나면 공부하면 될 텐데 작심삼일로 그친 횟수만 늘어간다.
졸업하려면, 영어는 해야지?
대학원에서는 영어시험 통과가 필수라 더 미적댈 수 없게 됐다. 발등에 불 떨어지겠다 싶으니 절로 신년 목표 달성을 위한 세부 계획을 세웠다. 공부에 적당한 압박과 돈이 들어가야 된다더니 정말이다. 새로 회화 책을 주문했다. 이번에야 말로 목표 달성해야지. 플라워를 또 헷갈리면 안 되니까. 회화실력을 갖추기 위해 오랫동안 굳어있던 혀를 풀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언어 공부의 지속’이라는 지루하고도 긴 과정을 하나씩 밟아가야 한다. 이번에는 작심삼일 대신 작심오일이라도 할 수 있기를.
후기
언어 공부는 끝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끝을 잘 낸다. 작심삼일로 끝내고, 다음 주면 또 의지 불태우며 시작하고.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다. 실력이 너무 비루해서 영어공부를 무한히 시작하고, 끝내고, 시작하고, 끝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