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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Jul 18. 2021

그림 많고, 글은 조금만 있는 책

흰 종이 대부분이 새까만 글로 채워진 페이지를 좋아한다. 꽉 꽉 채워진 문장을 볼 때의 두근거림과 기분 좋음을 사랑해서 그림책은 손댈 일이 없다. 책만 보면 잠 온다는 친구는 그림이 많고, 글은 조금 있는 책이 좋다고 말했다. 난 속으로 ‘그런 건 캐릭터를 앞세운 에세이나 그림책 밖에 없을 텐데.’했다. 


그런 내가, 그림책에 빠졌다.     


일. 대학원. 과제. 공부. 완벽한 톱니바퀴를 그리는 일정에서 가장 빠르게 줄어든 건 독서시간이었다. 회사 점심시간에 짬을 내 읽자니 책에 깊이 빠질 수 없어 산만했다. 그래서 찾은 게 그림책이었다. 


예쁜 그림 보는 재미로 한 권, 그림체가 귀엽잖아! 한 권. 유튜브 알고리즘마냥 서점 사이트가 책도 추천해주니 또 한 권. 빠르게 읽을 수 있고 이해는 쉬우면서 그림으로 눈 호강까지 톡톡히 할 수 있었다. 읽다보면 마음이 따뜻해졌고, 어떤 그림책을 읽고 나면 나도 몰랐던 텅 빈 공간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 부쩍 그림책을 읽는다거나, 좋아한다는 친구들이 많다. 그림책에는 현실에서 얻기 어려운 위로와 언제나 함께 하는 존재(가족, 친구, 동물, 물건 등)의 든든함, 불안이 사라지고 용기와 호기심이 샘솟는 마음, 그리고 다양성이 당연한 환경이 있다. 


그림책은 대부분 예측가능하고 언제나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잠이 안 오는 주인공은 달에 사는 토끼와 함께 친구를 만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주인공은 환상 같은 바다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딩동- 친구 집에 벨을 누르는 주인공의 부름에 친구들은 항상 응답하고, 나랑 똑같이 생긴 여우는 곁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봐주고 안아준다. 


갈수록 빨라지고, 사는 게 힘드니 마음의 여유는 줄어들고, 경험할 수 있는 건 많지만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현실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어서 그림책을 그렇게들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카페 HAGO(하고)


몇 주 전에 그림책 서점 겸 카페 hago에 다녀왔다. 계기는 나처럼 대학원에서 미술치료를 공부한 사장님이 서점을 열었다는 오래된 기사였고, 실행은 방학 덕에 찾아온 할 거 없는 주말이었다. 브런치를 먹고 친구와 도보 5분 컷이 가능한 서점 hago에 도착했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들리는 소리에 나는 함박미소를 지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큰 책상에 앉은 아빠는 아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벽면과 책상에는 그림책이 가득이었다. 이런 게 평화로움이라는 거였지. 나는 음악소리 없는 공간에서 친구와 한참을 구경하다 책 두 권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혹시 사장님이냐는 내 물음에 사장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사를 보고 왔다고 했다. 꼭 와보고 싶었다는 말에 사장님은 약간의 놀람과 고마움을 전했다. 


나는 여러 종류의 그림책을 하나하나 살피며 왜 사장님이 기사 인터뷰에서 그림책이 나를 보는 창문이라고 하셨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림책 안에는 신나게 뛰노는 어린 내가 있었고, 상처를 끌어안고 웅크린 내가 있었으며, 다 자란 내가 있었다. 그림책의 인물들은 때로는 나 자신이, 때로는 안기고 싶은 따뜻한 존재, 가끔은 내가 바라는 존재였다. 


언젠가 작은 공간을 얻게 된다면 그곳에 꼭 그림책을 두겠다고 생각했다. 자체 검열을 할 수 있는 언어와 달리 무의식을 작동시키는 그림만이 주는 치유와 행복의 힘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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