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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Nov 14. 2021

우리는 낙서할 줄 아는 아기였다.

우리는 낙서할 줄 아는 아기였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어린이였다. 


무지막지하게 휘두르고 손 가는 대로 그리는 아기 시절은 거칠게 없다. 벽지에도 그리고 그림 그리라고 놔둔 종이를 벗어나 바닥이나 책상에 죽죽 줄을 긋기도 한다. 이 시기를 ‘난화기(2~4세)’라고 하는데 첫 자기표현의 시작이라 부른다.      


봐도 도무지 뭘 그린 건지 알 수 없는 시기를 지나면 세상에 그릴게 너무 많아! 즐거워지는 시기가 온다. 재현을 시도하는 전도식기(4~7세)도식기(7~9세) 시절에는 어설픈 사람 형태를 그리기 시작한다.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주관적으로 그리기 때문에 사람 머리가 엄청 크고 몸통이 작기도 하고, 걸어 다니는 당근도 그리고 휘황찬란한 색으로 색칠하기도 한다.      


‘또래집단기(9~11세)’쯤 오면 구체적인 사실 표현을 한다. 사람이 제법 사람처럼 보이고, 나무를 그리면 누가 봐도 나무인 걸 알 수 있게 그릴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대부분은 여기서 멈춰있다. 


마구잡이로 그리는 즐거움은 예쁘게 잘 그리기 위한 배움과 성적 앞에서 도망친다. 요즘은 즐거운 미술 활동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도 많지만 내가 미술학원을 다니던 때는 잘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잘. 잘. 잘. 그놈의 ‘잘’은 자아표현의 시작점이자 창조성의 폭발을 이끄는 미술에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마음대로 그리기보다는 지도를 받는다. 나무를 그릴 때는 이런 색을 쓰고, 더 실제같이 그리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그림에 넣어주고 등등. 자의든 타의든 아이들은 그림 그리기를 멈춘다. 시키는 대로 그려서 완성하는 것은 재미없고, 그리기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실력이 애매하다. 낙서나 하면 모를까 미술학원을 다니거나 매일 같이 그림을 완성하는 건 거부한다. 미술학원 외에도 공부할 게 엄청 많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냥 그리는 것도 주저한다.      




심리학자인 로웬필드는 아동이 그리기를 계속하지 않거나 지지받지 못할 경우 결정기(13~17세)라 불리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했다. 결정기는 원근 표현, 명암 등의 기술적인 부분부터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 등 많은 것들이 정교해지고, 정서적으로 작품에 접근할 수 있는 시기다. 


미술에 흥미를 느끼고 계속 그리기를 지지받거나 또래집단을 통해 이를 지속할 수 있는 아동은 결정기에 그림 작업을 이어가고, 직업이 되지 않더라도 성인이 된 후까지 계속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림출처 - 나

내 그림은 딱 또래집단기 수준이라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뭘 그린 건지는 알겠는데 누가 볼까 창피한 수준. 그랬던 내가 미술을 좋아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 듣는 매체실습 과목 때문인데, 여러 매체(연필, 색연필, 콩테, 파스텔 등)를 접해보고 미술치료에 적합한 작업을 실습하는 과목이다.    

  

미술치료는 예쁜 작품을 만드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완성된 그림으로 성적을 매기지도 않기에 잘 그릴 필요도 없다. 못 그리면 어떤가 하는 자신감이 마구 올라온다. 매체도 엄청 많다.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을 이어갔을 뿐인데 내가 만든 작품에는 내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업시간에 각자 작품을 완성하고 난 뒤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진다. 나는 그 시간에 평온함을 느끼고, 내가 어떤 마음인지 확실히 알아간다.      

그림출처 - 나


언어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하는 세계. ‘잘’ 할 필요 없는 세계. 


나를 드러낸다고 해서 비난당하거나 무너지지지 않는 미술 앞에서 힘든 마음이 쉬어갈 수 있길 바라며 나는 부지런히 미술 매체를 접하고, 그리고, 발달단계를 보고 또 본다. 나처럼 어린 시절의 그림에 멈춰있는 이들의 자유로운 표현을 향한 한걸음이 수월하게 떨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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