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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Aug 09. 2019

크리스털 접시와 엄마의 칠절판

요리가 위로를 건넬 때.

어느 집에나 풀지 못한 문제는 있고, 꺼내지 못한 그릇이 있다. 이모네는 손님이 왔을 때만 꽃그림이 그려진 예쁜 머그컵을 꺼내 커피나 주스를 따라주고, 내 친구네 엄마는 집을 사면 풀겠다고 20년 넘게 보관 중인 예쁜 그릇세트가 있다. 우리 집에는 귀한 손님이 오면 한번 꺼낼까 말까 한 크리스털 잔과 접시가 있다. 형광등 아래서 보면 더 예쁜 크리스털 접시는 그날 밤, 매일 머물던 찬장에서 벗어나 식탁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      


네 명이 앉으면 딱 맞는 좁은 4인용 식탁. 크리스털 접시는 매일 보는 밥그릇과 국그릇을 밀어내고 당당하게 중앙을 차지했다. 접시의 가운데에는 희고 둥근 밀전병이 두툼하게 쌓였다. 밀전병을 중심으로 옴폭하게 들어간 접시의 칸 마다 흰색과 노란색의 달걀지단, 얇게 채 썬 오이와 당근, 소고기, 버섯이 자리했다.  

    

엄마는 젓가락으로 밀전병을 하나 떼어냈다. 본인의 접시에 두고 각종 재료를 얹고 돌돌 말아서 입에 쏙 넣는 법까지 보여주며 많이 먹고 아프지 말라는 말을 보탰다.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외식이 사라진 지 2달쯤 됐고 엄마가 해고를 당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아빠는 일하던 공장의 대표가 직원들 모르게 폐업을 준비해서 사라지는 바람에 실업자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다니던 이불공장에서 해고를 당했다. 둘이서 지탱하던 우리 집의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10년이 넘게 하던 미싱 일에서 자유를 얻은 대가로 생활비의 절반을 잃어야 했다. 당황과 분노와 체념의 단계를 거쳐 일을 구하던 엄마에게 나는 직업교육을 권했다. 다 늙어서 뭘 배우겠냐던 엄마는 국비지원으로 한식조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무숙 장아찌, 미나리강회, 완자탕 같은 처음 들어본 음식들이 제 자리처럼 식탁 위를 차지하곤 했다.     


엄마가 한식조리 연습을 한다며 집에 남은 재료로 만들어주신 미나리강회.


아빠는 도배기술을 배워 막 일을 시작했고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면접에서 합격한 곳 중에 월급을 제일 많이 주는 회사에 다니던 중이었다. 예전처럼 주말에 외식을 하러 나가거나 엄마가 좋아하는 홈쇼핑을 할 여유도, 돈도 없었다. 내 월급에서 꼬박꼬박 생활비가 나가기 시작했고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보통만큼의 저축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했다.      


꾸역꾸역 저녁밥을 밀어 넣으며 하루가 지나갔음을 실감하고,

눈을 감고 누우면 막막한 앞으로가 두려워 잠을 뒤척이고,

주말이 다가온 날이면 모처럼 풀린 긴장에 늘어지게 자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는 것보다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많은 날들 중, 그 날은 특별한 밤이었다. 엄마는 접시에 담긴 요리가 칠절판이라고 했다. 밀전병을 만들고, 재료들을 하나하나 채 써는 번거로운 요리인데 학원이랑 똑같은 재료는 못 구해서 있는 걸로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밀전병을 하나 떼어내 앞 접시에 두고, 각종 재료를 올려 크게 말아서 한 입에 넣었다. 담백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칠절판의 양과 상관없이 내 배는 따뜻한 포만감으로 가득했다. 사는 게 힘들어서, 힘들다는 말 밖에는 할 말도 없던 밥벌이의 고단함은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인 저녁식사 자리만 되면 스르륵 풀어지곤 했다.     


칠절판. 밀전병은 따뜻했고, 각종 채소와 고기는 담백하고 맛있었다.


외식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빈틈을 엄마는 본인의 요리로 채웠다. 아빠와 나와 동생은 세 마리의 돼지처럼 끊임없이 젓가락을 접시로 향하며 엄마가 건네는 칠절판의 위로와 응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표현이 서툰 엄마는 내가 아프거나 짜증을 낼 때면 깨죽을 끓여줬고, 싸우고 삐진 날이면 내가 좋아하는 삶은 옥수수를 사 와서 슬며시 내미는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횟수는 한 손에 꼽을 수 있는데, 말 대신 내민 음식은 셀 수 없이 많다. 세 끼를 먹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실감하던 겨울. 지친 표정으로 들어오는 내 모습과 아무 말이 없던 엄마. 점점 멀어지는 마음의 거리를 엄마는 칠절판으로 단단히 묶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지. 밥상머리에선 잘 먹고 통통하니 부른 배를 쓸며 하루가 지나갔구나 하고 가볍게 넘기면 된다. 예민한 성격 탓에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조금만 밥을 먹어도 헛구역질부터 하던 내게 엄마는 늘 속이 따뜻해지는 요리를 해주며 이겨낼 수 있다고, 다 지나간다고 알려줬다. 그러면 아직도 어른인 게 버거운 나는, 엄마의 요리를 먹고서야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금 세상살이를 겪어낼 힘을 얻었다.   

  

마음이 바닥으로만 치닫던 우리를 위해 칠절판이 식탁으로 올라왔던 겨울밤.

그 후로 칠절판이 다시 우리 집 식탁 위에 올라온 일은 없었고 계속 내려가던 우리 집의 내리막은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고, 2019년이 되며 이제는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살다가 욱하는 순간, 먹고사는 게 힘들 때면 나는 칠절판과 크리스털 원형 접시를 보며 마음을 고쳐 잡는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그러니 괜찮은 순간은 반드시 오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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