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27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여성 화가. 그녀의 장례식 날, 볼로냐 도시 전체는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녀를 추모하는 시와 음악이 흘러나오고, 실물 크기의 조각상으로 장식된 화려한 시신 안치대 앞에서는 그녀가 초상화를 그려준 귀부인들이 충격과 상심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느 왕후장상이나 유명인사에 못지않게 성대하게 거행된 이 장례식의 주인공은 엘리사베타 시라니 Elisabetta Sirani 1638-1665였다. 그녀는 우아한 고전적인 양식, 상냥하고 좋은 성품, 그리고 젊은 나이의 죽음 등이 라파엘로 Raffaello와 비슷하다 하여 ‘여자 라파엘로’로 불리어졌다.
시라니, <자화상>, 1660, 뮤제오 치비코 아르케오로지코, 볼로냐
시라니는 화가의 딸이었다. 귀도 레니 Guido Reni의 제자였던 아버지 지오반니 안드레아 시라니 Giovanni Andrea Sirani에게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귀도 레니는 바로크 양식의 화려하고 복잡한 특성을 고전적이고 절제된 표현으로 순화시킨 화풍을 가졌는데, 이는 시라니에게도 이어진다. 시라니는 곧 독창적이고 대담한 그녀 자신의 스타일을 개발했지만, 귀도 레니의 부드러운 색채와 차분한 분위기의 그림과 비슷해서, 간혹 그녀의 그림들이 귀도 레니의 작품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가족의 작업장을 맡은 후, 시라니는 코시모 데 메디치 Cosimo III de Medici를 비롯한 왕족, 귀족, 상인, 학자들의 후원을 받았으며, 외교관, 정치 지도자들이 그녀의 작업장을 직접 방문할 정도로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떨쳤다.
당시 볼로냐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매우 진보적인 도시였다.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격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볼로냐에는 이탈리아 전역의 여성 미술가들을 합친 수보다 많은 여성 예술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여성 미술가들이 활동이 활발했던 볼로냐 출신이었고,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여성 화가였다.
에필로그
시라니는 오랫동안 귀도 레니를 추종한 군소 화가로 취급되어왔으나, 최근에 와서 그림에 나타나는 미묘한 특징과 우아하고 숙련된 붓터치로 인해 재평가되고 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다른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작품들에 서명하지 않았던 시대에, 자신의 서명과 그린 날짜, 모델들의 이름 등의 목록을 만들어놓았다. 그동안 비평가들은 그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일부 그림들이 조잡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저평가했지만, 자신의 그림들 대부분에 서명을 했던 습관으로 보아, 그 작품들은 시라니의 것이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작품들은 거장의 풍모를 보여주는 고도의 기교를 지니고 있다.
당시에 여성은 아버지,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시라니의 죽음은 당시 볼로냐가 아무리 여성 친화적인 진보적 도시였다 해도, 가부장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억압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례이다. 볼로냐의 자유로운 공기는 시라니를 성공한 미술가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다른 도시보다 진보적이긴 하나, 여전히 견고한 부권 사회의 권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 중세 도시의 새장 속에 갇힌 한 마리 연약한 새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