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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Oct 31. 2019

미술, 과학을 품다

ㅡ - 명화 속의 별, 우주, 과학



뉴턴과 세잔이 하나의 사과를 바라본다고 가정해 보자. 같은 사과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것이다. 과학자는 사과가 왜 떨어질까에 대해 생각하고, 미술가는 사과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할 것이다. 이렇게 이들이 사과라는 사물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듯, 미술과 과학은 서로 별개의 영역이다. 하지만 두 분야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일까?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뛰어난 과학자이자 발명가였고, 또 다른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역시 훌륭한 해부학자였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예술가가 과학적 법칙을 발견하거나, 회화 속에서 과학적 법칙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근법이다. 이는 미술이나 과학 모두 세상을 탐색하고 표현하려는 인간 지성의 산물이며, 서로 통섭적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미술사에서도 별과 우주, 나아가 과학을 소재로 한 명화들을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중세의 피카소, 두려움 없이 혜성을 그리다


조토(Giotto di Bondone, 1266? ~ 1337)는 14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 출신의 화가이다. 중세 회화의 관념적인 평면성을 극복하고 화면에 3차원적인 입체감과 현실감을 표현하는 기법을 창시하여, 미술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미술가로 평가된다. 오늘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만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였고 당시 천재성을 인정받아 부와 명예를 누렸다. 현대 예술가로 보면 피카소 정도에 비견될 만한 성공한 화가였다.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 중 <동방박사의 경배>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수가 탄생했을 때 밤하늘에 떴다는 베들레헴의 별 대신에 코마와 꼬리가 분명한 핼리 혜성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조토는 1301년 핼리혜성을 눈으로 보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에 담았다. 1577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관측을 통해 혜성이 지구의 대기 현상이 아니라 천체라는 것을 증명할 때까지, 혜성은 인간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다. 혜성의 등장은 전쟁, 지도자의 죽음, 자연재해 등 불행한 일의 전조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14세기의 ‘화가’가 자신의 눈으로 본 혜성을 공포나 두려움의 감정 없이 자신의 그림 속에 자연현상으로 기록한 것은 놀랍지 않은가!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략 75년을 주기로 지구에 접근하는 핼리 혜성은 1986년에 지구를 방문했다. 이즈음 유럽우주국이 핼리 혜성 탐사선을 쏘아 올렸다. 이름은 조토. 그런데 왜 이 탐사선의 이름을 ‘조토’라고 지었을까? 핼리혜성 탐사선의 이름 조토는 그러니까 중세의 피카소가 그림 속에 그려 넣은 핼리 혜성에 대한 오마주(Hommage)다.


조토, <동방박사의 경배>, 1304-06년, 프레스코, 200 x 185 cm, 스크로베니 예배당, 파도바


천문학자, 수학자, 철학자 세계 최고의 지성들,
한 곳에 모이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1483∼1520)가 교황 율리오 2세의 주문으로 1509~1510년 사이에 바티칸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라파엘로의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서, 일점 소실점에 의한 원근법을 따르고 있어, 등장인물이 많아도 산만하지 않고 집중된 느낌을 준다. 고전 건축의 균형 감각과 질서, 선명성, 부분과 전체의 조화가 뛰어난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이다.
 
베드로 성당과 비슷해 보이는 이 학당에는 54명의 인물이 표현되어 있으며 대부분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들이다. 중앙에 있는 사람의 왼쪽이 관념 세계를 대표하는 플라톤이고 오른쪽의 파란 옷이 과학과 자연계의 탐구를 상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는 플라톤(Platon: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습으로 그려짐)은 이데아에 대해 설명하듯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윤리학Eticha'이라는 책을 허벅지에 받치고 지상을 가리키며 현실 세계를 논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앞의 계단 한복판에 보라색의 망토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은 명예와 부귀를 천시했던 견유학파 디오게네스( Diogenes)이다.


왼쪽 화면의 앞에서, 약간 대머리에 쭈그려 앉아 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는 피타고라스 (Pythagoras)도 있다. 오른쪽에는 사색의 즐거움에 깊이 잠겨 있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미켈란젤로의 모습)가 대리석 탁자에 기댄 채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종이 위에 글자를 적는다. 뒤에는 앞머리가 벗어지고 들창코인 소크라테스(Socrates)가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무엇인가 설파하고 있다. 오른쪽에 아래에는 허리를 굽혀 컴퍼스를 돌리고 있는 유클리드(Euclid)가 있으며 유클리드 뒤에 등을 보이고 지구를 두 손으로 들고 서 있는 조로아스터(Zarathushtra), 별이 반짝이는 천구를 한 손으로 받쳐 든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가 있다.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사이에, 이 그림의 유일한 여성이 비스듬히 서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고대 지성들 가운데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은 히파티아(Hypatia)이다. 그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걸출한 여성 중 한 명이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뮤즈의 여신, 철학자였고, 외모 또한 매우 아름다워 대중의 열광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여성이 수학을 잘하는 것을 마녀라고 간주한 기독교 일파에 의해 피부가 벗기어진 채 고통스럽고 잔인한 죽임을 당했다. 만약, 이 54명의 쟁쟁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라파엘로, <아테나 학당>, 1510-11년, 프레스코, 500 x 770 cm, 라파엘로의 방 중 서명의 방,  바티칸 궁, 로마


라파엘로 <아테나 학당>  세부



화가의 모델이 된 과학자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mer, 1632 ~1675)는 고개를 살짝 돌려 관람객을 바라보는 매혹적인 큰 눈의 소녀,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다. 이 그림 속, 창문의 햇빛을 얼굴 가득히 받고 있는 천문학자는 별자리가 그려진 천구의를 천천히 돌리며 보고 있다.

 
천구의 왼쪽 상반부에 큰곰자리가 그려져 있고, 책상에는 천문 관측기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 펼쳐 놓은 책은 천문학과 지리학 지침서이다. 이 천문학자는 페르메이르의 이웃이었던 과학자 반 레이우엔훅일 가능성이 높다. 처음으로 광학렌즈를 발명한 그는 페르메이르가 카메라 옵스큐라 기법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현미경, 망원경을 발명했을 정도로 광학 강국이었다. 그 또한 카메라 옵스큐라(바늘구멍 사진기)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등 광학 현상에 관심을 두었다. 그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보이는 물리적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빛의 현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사진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와 함께 페르메이르는 그만의 독자적인 색감, 빛의 대조,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일상생활의 모습을 담았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의 과학 발전에 고무되었고, 특히 천문학, 망원경의 발전으로 결과된 항해술에 힘입어 해외 상업과 무역 활동이 왕성한, 번영하는 나라였다. 자연스럽게 천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았고,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분위기는 한 화가의 그림에서 천문학자가 모델로 나타나도록 했으니, 미술은 단지 심미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넘어서서 인간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페르메이르, <천문학자>, 1668년, 캔버스에 유채, 51 x  45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새로운 과학혁명의 시대를 그린 화가


사소한 것 하나가 삶이나 사회를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것처럼 과학 도구 하나가 과학의 발전, 나아가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현대적인 ‘태양계의’는 천문학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태양계의(orrery)’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따라 태양을 가운데 두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달, 기타 행성들의 궤도와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게 만들어진 도구로서, 천문학의 큰 성과일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유용하게 시용함으로써 천문학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조셉 라이트(Joseph Wright,  1734 ~ 1797)는 영국 산업혁명 시대의 화가이다. 그가 태어난 더비는 산업혁명의 중심지로서, 그 역시 산업혁명과 기계 문명을 그림의 소재로 했다. 라이트의 '태양계의에 대해 강의하는 과학자'를 통해 18세기 영국의 과학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사람들은 불이 환하게 켜진 태양계의를 관찰하고 있으며 붉은색 외투를 입은 과학자는 일어선 채로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태양계를 설명하는 과학자는 더비의 유명한 시계공이자 지질학자인 존 화이트허스트이다. 우주는 신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인다는 라이트의 생각을 보여준다. 화면 왼쪽 태양계의를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은 퍼러스 백작의 조카다. 퍼러스 백작은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 천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사람이다. 퍼러스 백작의 조카는 새로운 과학에 대한 귀족들의 교육열을 의미하며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청년은 중산층을 나타낸다. 이들은 과학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열망을 상징한다.


조셉 라이트, <태양계의에 대해 강의하는 과학자>, 1766년, 캔버스에 유채, 147 x 203cm, 더비 박물관, 더비



극한의 삶의 고통 속에서 별을 꿈꾸다
 

고흐(Vicent Van Gogh, 1853 ~ 1890)는 유독 별을 좋아했다.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테라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등 밤하늘 그리고 별을 표현한 작품이 많다. “별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를 꿈꾸게 한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고단한 삶에, 밤하늘의 별은 단 하나의 편안한 꿈의 안식처였는지도.

 
고흐의 삶은 불행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연거푸 실패한 사랑, 가족과의 불화, 성직에 대한 소망의 좌절, 한 평생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성, 그리고 가난. 1889년에는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을 귀를 자른 고흐는 생 레미의 정신병원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과 밤하늘을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의 후기 걸작으로 꼽힌다. 고흐만의 강렬한 붓 터치와 노란색과 파란색의 대비 때문인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듯한 사이프러스 나무는 매우 강렬한 색채와 물결 모양의 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나무는 통상 죽음, 애도, 무덤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고흐의 불안한 정서와 죽음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안식에 대한 염원이 그림 속에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늘은 수많은 별들이 소용돌이치며 역동적인 모습인데 비해, 그 아래 펼쳐진 마을은 매우 고요하고 정적에 싸여 있다. 고흐는 밤하늘을 ‘별이 있는 장엄한 하늘, 결국은 신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영원의 세계’라고 말한 바 있다. “왜 하늘의 빛나는 점들에는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처럼 닿을 수 없을까? 티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듯이,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고 말했듯이 고흐에게 죽음은 별을 보러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결국 1890년 37년간의 고흐의 고뇌에 찬 짧은 삶은 권총 자살로 끝이 난다.


사람들은 깊은 어둠 속 너머로 빛나는 별을 보면서 미지의 광활한 그곳을 두려워하면서도, 천체망원경을 만들고 달과 화성에 우주탐사선을 띄워 우주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별들도 우리처럼 태어나 성장하고 나이 들고 죽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별은 안타깝지만 가엾은 고흐가 꿈꾸었던 것처럼 신과 영원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별들이 저마다 빛을 가지고 있듯이, 그가 남긴 것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고 의미가 된다는 점에서, 고흐는 자신만의 빛을 낸 하나의 별이었다. 그리고 고흐가 그런 것처럼 우리 모두는 또 하나의 별이 아닐까?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캔버스에 유채, 73.9x92.1cm,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별을 노래한 시인 화가, 해석하지 말고 느껴라!


호안 미로 별자리 시리즈( the Constellation series) 

 

미로(Joan Miro, 1893 ~1983)는 당시 유럽 미술계를 풍미하던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를 거쳐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각각의 양식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받아들여, 밝은 색채와 추상적인 형태들에 의해 자신만의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개성의 양식을 만들어냈다. 미로는 어떤 화파로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만 시인의 영혼과 상상력에 의해 현실을 변형시켜 꿈과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내려고 하였다.
 
특히 미로는 1940년에서 1941년 사이 2차 세계대전을 피해 고향 카탈루냐 지방으로 돌아와 별자리 시리즈를 제작한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절망과 유럽 문명에 대한 회의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일어나던 이 시기에, 미로는 별자리 시리즈에서 기호적이고 유희적 형태들을 통해 우주의 질서와 우주 만물의 행복한 협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고 했다. 자연의 온갖 생명체들, 새들과 동물들, 사람들 그리고 자연물들, 별과 달 같은 복잡한 생명체와 사물들은 단순하고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소통하는 듯하다. 미로는 별과 우주의 세계에서 타락하지 않은 순수의 힘, 모든 인간의 불행과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는 원동력과 삶의 환희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미로, <새벽을 깨우는 별자리들>, 1941년, 종이에 과슈와 테르펜틴, 46 x 38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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