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성 탈출 > 시리즈
<혹성탈출>(원제는 <Planet of the Apes>)은 1968년부터 시작되어 2017년까지 총 9편이 탄생한 인기 SF시리즈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유인원들의 행성"이며, 혹성이란 단어는 우리말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일제 잔재의 여파로 아직껏 이런 요상한 번역으로 굳어져 있다. 어쨌든 유인원에게 지배당하는 인간, 혹은 만물의 영장인 인류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유인원이라는 매혹적이고 충격적인 스토리에서 시작된 '혹성탈출'시리즈는 감독과 제작진이 바뀌면서도 꾸준히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 왔다.
< 혹성 탈출 > 시리즈의 시초
ㅡ < 1968년 혹성 탈출 >
< 1968년 혹성 탈출 > 스틸컷들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최초의 <혹성 탈출>을 보면서, 관객들은 유인원들이 옷을 입고 언어를 사용하는 반면, 인간들은 헐벗고 지능이 떨어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다른 어떤 동물도 따라올 수 없는 절대적 우위를 점한 인간의 지적 능력에 털끝만큼도 의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자만심은 유인원류와 역전된 상황 속에서 여지없이 뭉개진다.
< 2011년 혹성 탈출 : 진화의 시작 >
약 반 세기 후에 만들어진 <혹성 탈출 : 진화의 시작>은 1968년 <혹성탈출>의 침팬지들이 어떻게 인간을 능가하게 되었는지의 사연을 풀어낸다.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유와 존재의 존엄성을 찾기 위해 인류에게 저항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저 고등 동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전에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생각해보는 발상의 전환을 경험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이러한 일련의 <혹성탈출> 시리즈를 보면서, 인류가 다른 종의 진화적 추월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비록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모든 진화 과정의 최정점에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 가장 하찮아 보이는 생물들과도 극단적인 유전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침팬지류와는 유전적으로 99.6% 정도로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히 먼 미래에서조차 침팬지가 인류를 능가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0.4%의 차이는 그들이 숲이나 동물원에서 헤매는 동안, 인류의 시야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여행을 꿈꾸고, 달의 표면을 밟았으며, 정교한 감성을 통해 시와 미술, 철학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1968년 <혹성탈출>이 사람들에게 최초의 충격을 준 시리즈의 시작이라면, 2011년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 과정에 실험용으로 사용된 유인원 어미에게서 태어나 약의 부작용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엄청난 지능을 갖게 된 침팬지 시저의 탄생을 통해, 어떻게 인간이 멸망했고 유인원이 인간보다 높은 지능을 가지게 됐는가를 설명한다.
사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상황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고 한다. 한 연구진은 원숭이의 뇌에 신경보철을 삽입한 후 동일한 그림을 골라내게 했다. 동시에 그림을 고를 때 뇌의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를 파악하고, 뇌에 심어둔 신경보철을 통해 비슷한 신호를 보내도록 프로그램했다. 그 결과 같은 그림을 선택하는 테스트에서 원숭이들은 눈에 띄는 지능 향상을 보였다. 이러한 실험은 상대적으로 하등한 동물들조차 상황에 따라 놀라운 진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의 진화적 단계에 가장 근접해 있는 유인원류가 언젠가 역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의식 깊숙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인간과 침팬지의 잡종은 어떨까? '휴먼지(Humanzee)', '추먼지(Chumanzee)라고도 불릴 수 있는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1920년대에 소련의 생물학자 일리아 이바노프(Ilia Ivanov)는 암컷 침팬지에게 인간의 정자의 인공수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적도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메라(chimera)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사악한 괴물이다. 이 동물은 암사자의 머리, 염소의 몸통, 뱀의 꼬리를 가지고 있고 불을 뿜는다. 인간의 유전자를 다른 동물과 이종 결합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는 유전학적인 기술은 이 공상의 동물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 현대의 세계 각지의 유전공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인간과 동물간 DNA를 섞은 하이브리드(혼합종) 키메라를 연구하고 있다. 인간의 DNA를 쥐, 토끼, 고양이, 소, 양 등에 이식해왔다. 휴먼지가 성공해 인간의 명민한 두뇌와 침팬지의 동물적 폭력성을 가진 이종 생명체가 나타난다면?
한편, 2011년작을 위시하여 이어지는 < 2014년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 < 2017년 혹성탈출 : 종의 전쟁 >에서도 모두, 인간의 미래를 겁나게 하는 영화 속 유인원들은 인간의 말을 하고, 인간처럼 말을 타며,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인간성을 모두 가진 인간의 모습 그 자체이다. 이런 고등 동물들이 먼 미래의 언젠가 엄청난 진화를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어떤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것인가? 최고의 진화의 형태가 결국 우리의 모습이라는 설정은 인간의 기막힌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 2014년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
< 2017년 혹성탈출 : 종의 전쟁 >
휴먼지의 가능성 외에 생각해볼만한 더 심각한 과학기술 발달의 부작용도 있다. 정작 인류를 위협하는 제3의 존재가 따로 있다. 지구상의 생물은 40억 년에 걸쳐 진화해왔고, 그중 인류 탄생의 기원은 비록 최고 500-600만 년 전, 현생인류의 경우 몇 만 년까지 추적되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은 가공할 만한 것이다. ‘수확가속의 법칙’에 의해 본질적으로 가속화되는 속성을 가진 테크놀로지의 발달 속도로 인해, 인간은 이제 스스로 인간의 뇌를 추월하는 AI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다수의 미래학자들은 핵전쟁, 전염병 등과 함께 인공지능이 인류 멸망 시나리오의 가장 유력한 기폭제 중 하나가 될 것으로 꼽는다. 유전공학의 성과로 나타날 키메라적 존재이든 AI이든, 인류 역사상 과학기술적인 면에서 전례 없는 속도로 달려온 이 시점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