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지 Mar 24. 2022

히틀러의 그림은 정말 형편없었을까?

ㅡ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독재자 히틀러


히틀러는 예술가라기보다는 타고난 선동가였다. 그는 독일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상했다. 우월한 아리아인 인종이 다스리는 이상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전쟁, 그리고 타인종에 대한 대량 학살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히틀러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자신의 망상을 사람들에게 믿도록 설득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자극하는 행진곡 속에서 어두운 조명이 켜진 길을 휘하와 함께 연단까지 걸어가는 장엄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리고 화려한 수사와 단호한 태도, 분노와 열정의 연설이 이어졌다. 이러한 대규모 군중대회 속에서 히틀러는 사람들의 사고를 무력화시켰고, 맹목적인 지지자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는 오로지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독일을 구할 메시아였다.


 한편, 히틀러는 화가이기도 했다. 1925년에 출간한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 의하면, 히틀러는 하루에 2~3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비엔나에서 거의 1,0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제작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후 그의 수채화와 유화 작품을 최대한 추적하고 구매하라고 명령했다. 그림의 대부분은 히틀러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3제국이 몰락하고 베를린 연합군이 포위된 후, 나머지 그림 중 상당수는 미 육군과 연합군의 군대에 의해 압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수백 점에 이르는 히틀러의 그림이 전 세계에 남아 있고, 그중 상당수는 경매에서 판매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나치의 상징을 묘사하지 않는 한 히틀러의 작품 판매는 사실상 합법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그림이 경매에 투입될 때마다 도덕적 논쟁이 벌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역사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그림을 판매해 돈을 버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말하며 격렬하게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한편, 수많은 위작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의 작품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가로 팔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그림은 어땠을까?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창의성이 없고 진부하고 평범한 수준의 아마추어 화가의 그림이었을까? 이번 한국일보 칼럼은 히틀러의 그림을 주제로 풀어보았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32411120001610



                               아돌프 히틀러, '노이슈반슈타인 성', 1914년(출처 위키미디어)




아돌프 히틀러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악명 높은 인물이다. 최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대통령 푸틴 덕분에 그가 다시 소환되고 있다. 푸틴과 히틀러의 얼굴을 합성한 '푸틀러' 사진까지 등장했다. 그의 몰락 이후 80여 년간 히틀러는 전례를 찾기 힘든 광포한 학살자, 인간 괴물의 대명사였다. 뜻밖에도, 히틀러는 그림 그리기를 매우 좋아했던 화가이자 예술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 고전 조각을 사랑했고 바그너를 숭배했다. 히틀러의 그림은 어땠을까? 많은 비평가들은 그가 평범한 아마추어 화가에 불과했으며 그림도 무미건조하고 감정이 없다고 혹평한다. 이 사악한 독재자의 그림은 정말 예술적으로 형편없었을까?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그가 평범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한 아버지는 아들의 예술적 재능과 야망을 무시하고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학교를 중퇴한 18세의 히틀러는 화가가 되기 위해 아름다운 예술 도시 빈으로 간다.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일하는 틈틈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빈의 건물이나 랜드마크 엽서 그림을 모사한 유화, 수채화 소품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히틀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의 교회, 호수, 성 같은 목가적인 풍경도 즐겨 그렸다.


                            아돌프 히틀러, '산이 있는 호수의 집', 1910년(출처 위키미디어)




그의 작품 대부분은 건물과 풍경을 그린 것이며,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히틀러는 특히 건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빈 시절 일찌감치 도시의 거대한 호텔과 상점, 새로 지어진 훌륭한 건축물들에 매혹되었다. 히틀러의 건물 그림은 건축 설계 도안처럼 딱딱해 보이며,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소시오패스적 성향과 연관시키는 이들도 있다.


히틀러의 작품에 대해서는 기술적 완성도가 떨어지고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독창성이 없다는 부정적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악행을 연상하지 않고 그의 그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히틀러는 엽서 그림을 모사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미술학교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 만약 히틀러의 작품이란 것을 모르고 본다면 꽤 괜찮게 그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만, 건물 일러스트레이션엔 훌륭했지만 사람을 그리는 데는 별로 능숙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빈 미술 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지원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사실, 그의 누드 그림들을 보면 인체 해부학이나 얼굴 표정 묘사에 있어 매우 서툴다. 또한, 20세기 초는 뒤샹, 칸딘스키, 피카소와 같은 혁신적인 예술가들이 등장한 모더니즘의 시대였다. 히틀러의 그림은 한물간 구시대의 전통을 붙들고 있었다. 그는 신화, 민담, 아름다운 자연을 그린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들을 좋아했고, 그저 그들의 작품을 베꼈다. 그에게는 현대미술계 천재들의 독창성, 새로운 예술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 '뮌헨의 오래된 주택 안뜰', 1914년(출처 위키미디어)




비평가나 심리학자들은 히틀러의 그림 속에서 그의 악마적인 삶과 정신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그린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보자. 이 역사적인 괴물은 인간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의 인생은 망상과 광기로 얼룩졌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진지했고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예술가를 꿈꾸었던 순수한 소년의 영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 유대인 소녀와의 따뜻한 우정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 역시 그를 전무후무한 소시오패스 냉혈한으로 알고 있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히틀러는 나치의 중요한 정책을 구상했던 알프스의 베르크호프 별장에서 알게 된 7세짜리 소녀 로사와 5년간이나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총통의 아이' 로사는 히틀러를 삼촌이라 불렀고 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소녀가 유대인인 것이 곧 밝혀졌지만 히틀러는 우정을 깨지 않았다.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였고 동물보호법을 만들 정도로 동물을 끔찍이 사랑했다. 최소한 군중 앞에서의 히틀러는 유쾌하고 다정하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했다. 악은 이렇듯 평범한 얼굴로 늘 우리 곁에 있다. 선과 악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명확히 구분되어 있을까? 파렴치한 범죄자나 잔혹한 살인자를 다룬 기사에 주렁주렁 달린 폭력과 살의로 가득 찬 댓글들, 나와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고 사악한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그들 대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만이 선하고 정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악이라고 규정한 상대를 용납하지 못할 뿐이다. 히틀러와 그의 맹목적인 지지자들도 그랬다. 그의 그림은 죄가 없다. 애꿎은 그림에서 이상 성격을 발견하려고 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보는 게 합리적이다.


히틀러는 정치가로도 예술가로도 실패했다. 그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 실패했다. 그가 남긴 수백 점의 그림 역시 인류사상 가장 끔찍한 악인을 증언하는 혐오스러운 역사적 증거물로만 그 존재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첫 여전사 나탈리아 곤차로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