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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Aug 08. 2023

브런치 유감

ㅡ 김은경 가정사를 폭로한 시누이 글


브런치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브런치 플랫폼은 글쓰기를 좋아하고 작가의 꿈을 이루려는 이들이 모인 곳으로, 정치색 있는 글이 적고 비교적 양질의 합리적인 글이 많다. 최근 노인폄하 발언과 그 사과발언 과정에서 부적절한 말과 태도로 입길에 오른 김은경 씨의 시누이라는 분이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본인은 나름 공익 차원에서 김은경 씨의 공직 자격에 대해 공론화하고 싶었던 듯하나, 브런치에서 이런 류의 글을 보다니 유감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을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 대단한 자리에 하필 저런 사람이 등용되다니, 입신양명에는 능력이나 인품이 아니라 학위와 운, 인맥이 중요한 것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노인 대표가 사진을 들고 따귀를 퍽퍽 소리가 나도록 때리는 장면도 참 가관이었다. 김은경 씨의 실언이 워낙 치명적이어서 그런지 이 폭력적 퍼포먼스는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제 또 김은경 씨의 시누이에 의해 그녀의 악행(?)을 폭로하는 글까지 등장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어두운 가족사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세상에 낱낱이 발가벗겨져 공개되었다.


읽어봤다. 읽은 후의 느낌은 글쓴이가 브런치를 개인적 감정의 배설 장소로 삼았구나 하는 것이었다. 흔하디 흔한 사이 나쁜 올케와 시누이의 실루엣만이 어른거렸다. 글쓴이는 김 씨가 남편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 남편 사후 그의 차를 팔고 이사를 갔다는 것, 자신 몫으로 들어온 조의금을 가져간 것, 남편의 유산을 상속했다는 것 등등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뭐가 문제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 근거들을 내세웠다.


김은경 씨에 대해 옹호할 마음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녀의 시누이의 글 역시 공감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그들 간의 공박이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대부분 글쓴이에 동조하며 김 씨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물론 브런치 작가들의 댓글은 거의 없고 절대 대다수가 단지 브런치 계정을 가진 익명인들이었다. 브런치 랫폼이 개인적 가족 갈등을 폭로하고 혐오와 비난의 댓글들을 덕지덕지 끌어들이는 공간으로 이용됐다는 것이 꽤 유쾌하지 않았다. 좋은 먹잇감을 발견하고 취재원으로 이용하려는지 연락을 달라는 조선일보 기자의 댓글까지 있었다. 브런치에서뿐만이 아니다. 이때다 싶어 하이에나처럼 달려든 온갖 무리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일방적인 정보에 의존해 자신이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남의 가정사를 성급하게 판단하고 편들기하 욕설을 해대는 것일까?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누군가의 악함을 함께 성토하고 연대하면서 모종의 소속감, 정서적 안정감, 나아가 자기 존재 가치를 느끼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의 이고 상대는 나쁜 자라는 선명한 선악 구도를 가지고 다. 물론 착각이다. 악한 자를 욕하면서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인하고 이로 인한 짜릿한 희열도 얻는다.


선악 판단에 관련된 사안,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은 자칫 자극적이고 선동적으로 흐르기 쉽다. 글은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에 쾌감을 느끼고 그것도 권력이랍시고 즐기는 글쓴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선동적인 화법을 통해 사람들의 공격성을 부추기고 조롱과 욕설의 문화로 이끈다. 돈 되는 유튜브는 물론 돈이 안 되는 페북에서도 그런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러다가 서로 싸우고, 하소연하고, 삭제 혹은 차단하고, 끼리끼리의 서클 안에 머물며 우물 안 개구리 짓을 한다. 그 사람이 좌파든 우파든, 많이 배웠든. 유명인이든, 이성과 논리보다는 거친 혐오와 비난, 조롱의 문구를 배설하고 있다면 결코 휘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소통과 공감은 인간 사회의 핵심이다. 혹독한 자연세계에서 신체적으로 열등한 호모 사피엔스가 만물의 영장이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른바 '소통과 공감'으로 위장한 군중심리 혹은 대중심리는 참으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안을 판단하는 데 있어 많은 이들이 막연히 집단의 생각과 행동에 휩쓸려 가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군중심리는 나치 독일과 중국의 문화혁명, 우리나라 독재정권 하에서의 빨갱이 사냥 등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역사는 무조건 한 집단에서 대세가 된 의견에 따르려는 사회적 공명현상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는 군중들 사이에 팔짱을 끼고 비판적인 눈초리로 바라보는 단 한 사람의 사진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나 역시 시누이이자 올케다. 시누이, 올케와 사이가 나쁘진 않지만 과연 그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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