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자원을 공평하게 나눠 갖는 석기시대의 원시 공동체 사회는 잉여 생산물과 청동 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균등한 분배와 구성원 간의 평등한 관계에 기초하는 사회체제가 허물어지고 계급 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힘센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하게 되었고, 인간 사회는 각종 차별과 불평등의 역사를 새로이 쓰게 된다. 한편, 이러한 차별을 없애고자 끊임없이 투쟁해온 것 역시 인간의 역사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의 부당함을 외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모든 사람이 평등했던 이상적인 원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까?
<파 프럼 헤븐 Far From Heaven, 2002>에서는 인간 사회의 세 가지 차별 문제를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성 차별 Sexism, 인종 차별 Racism, 반동성애 Anti-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가 그것이다.
세 가지 차별 : Sexism, Racism, Anti-LGBT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미국이다. 당시 미국 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인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준 시대인 동시에, 매카시즘 McCarthyism의 광풍이 휘몰아친 비이성적인 시대였다. 미국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광기 속에서, 보수적인 규범이 확고히 자리 잡았고 자유주의 정신이 위축된 시기였다. 사람들은 여성의 성 역할, 동성애, 인종 문제 등에 있어서도 매우 보수적이고 완고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노예 해방은 되었으나 여전히 인종주의가 만연하고 여성은 남성의 보호 아래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적인 남성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한 지방 도시에서, 한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캐서린은 회사 중역으로 일하는 남편과 예쁜 남매를 둔 중산층 가정주부이다. 그녀는 가정부와 정원사를 둘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남편 내조와 집안일에 충실한 현모양처형의 여자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낯선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완벽해 보였던 가정은 균열이 일어난다. 남편은 그동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겨왔던 것이다. 스스로 이상적인 가정의 행복한 아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돈을 느낀다. 나는 누구였던가. 내가 믿고 의지하던 것들은 실체가 아닌 허깨비였던것인가.
겉보기에만 좋은 가짜 인생을 살았던 것은 남편 프랭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엔 동성애가 그 누구한테도 성적 취향으로 이해받지 못했고 심지어 정신병으로까지 취급되었다. 지금은 해마다 전 세계에서 공개적으로 퀴어 축제를 할 만큼 많이 개선되었지만, 지금도 동성애자를 정신 이상, 혹은 자연을 거스르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는 시각이 여전하다. 커밍 아웃에는 아직도 용기가 필요하며, 특히 종교계에서는 이를 죄악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한편, 마음의 상처를 받은 캐서린은 이전 정원사의 아들인 레이먼드를 우연히 알게 된 후,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는 경영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지만,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인해 능력에 걸맞은 직업 대신 꽃집을 경영하고 있는 처지였다. 친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얘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레이먼드에게 심경을 토로하고, 마음의 위안을 받으며 같이 산책도 하고 술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레이먼드와 캐서린이 함께 있는 모습은 마을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나쁜 소문까지 퍼진다.
두 사람은 왜 진실한 정신적 교감을 느끼면서도 왜 맺어질 수 없을까?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아무 의미와 가치도 없는데도, 왜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될까? 남자는 흑인이고 여자는 백인이기 때문이다. 당시의미국 사회에서, 한 사람은 흑인, 또 한 사람은 여자라는 점에서 둘 다 사회적 소수자에 속하지만, 백인 여자는 흑인 남자보다 계급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백인 여자는 백인 남자에 대해 열등한 존재이고, 흑인 남자는 백인 남자와 여자의 아래에 있는 처지였던 것이다. 극 중, 그녀와의 인터뷰를 한 잡지사는 '흑인에게도 우호적인'이라는 멘트로 캐서린을 소개하는데, 이는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시각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표현이다. 지금도 인종주의는 미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사라지지 않은 심각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녀가 여성을 옭아매는 당대 보수적인 사회 통념, 즉 자신의 감정과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윤리적 가치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운동은 아직도 해야 할 일도 많고 갈 길도 멀다.
결백을 주장하는 캐서린의 주장으로 소문은 일단락되지만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 한편, 레이먼드는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혼을 결심한 캐서린이 그에게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하지만, 레이먼드는 "다른 세계를 넘본 대가로 내게 주어진 것은 고통뿐이었다."며 거부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떠나는 기차 플랫폼에서 마지막 이별을 나누고 쓸쓸히 홀로 돌아온다.
지금은 그때처럼 흑백 간의 결혼이 노골적으로 사회적 비난, 혹은 역겨움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현재의 미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흑백 간의, 혹은 아시아인이나 히스패닉과 백인의 인종간 결합보다는 끼리끼리 맺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해와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낸 오해 '다름'과 '틀림'
우리는 언어에서 '같음'의 반대말은 '다름'이고, '맞다'의 반의어는 '틀리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다름'을 '틀림'으로 혼동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흔하게 일어나는 언어적 오류이다. 이러한 혼동은 언어 사용에서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부지불식간에,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과 정치색에 따른 이분화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남과 다른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말로는 자신들이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며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생각이 타인과 상충될 때, 혹은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가치관이나 이념을 접했을 때, 쉽사리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이런 개인의 생각들이 확대되고 끼리끼리 집단으로 뭉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 배척의 근거로 사용된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0년대 미국 사회의 현실은 2020년대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안티 페미니즘, 반동성애, 인종 차별적 반다문화 정서 등이 그것들이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폭력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상 사라지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