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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가는 소풍 같은 여행길

ㅡ 파리에 가고 싶다

by 김선지


어느 날 나에게 파리로 가는 소풍같이 아름다운 여행길이 허락된다면, 단조롭고 피곤한 일상에서 멀리 탈출해 인생의 여백을 만끽할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이 영화의 스틸컷을 따라가 보면서 상상 속의 여로를 즐겨보자.


이 영화를 제작한 엘레노어 코폴라 Eleanor Coppola는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아내로,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작가이다. <파리로 가는 길 Paris Can Wait, 2017년 작>은 그녀의 상업 영화 데뷔 작으로 80세 되던 해 제작했다.


MV5BMTYxNTIxNDU4MV5BMl5BanBnXkFtZTgwNjczNjM2OTE@._V1_SY1000_CR0,0,1498,1000_AL_.jpg 다이앤 레인과 아르노 비야르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





때로는 천천히, 느리게 가도 괜찮아!


영화제작자인 남편 마이클과 함께 칸에 온 앤은 귓병이 나, 남편의 다음 행선지인 부다페스트에 동행하지 못하고 파리로 가게 된다. 남편의 사업 피트너인 자크가 길 안내를 자청하는데, 앤은 몇 시간이면 갈 파리를 며칠에 걸쳐 자크와 동행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여행의 경험과 함께 인생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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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자크와 함께 칸을 시작으로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햇빛이 따사롭고 한적한 프랑스 시골 엑프로방스, 가르동 강에 놓인 고대 로마의 수도교 퐁뒤 가르, 그리고 리옹에서는 세계 최초로 영화를 제작한 뤼미에르 형제의 역사와 그들이 촬영에 사용한 카메라 ‘시네마토그라프’ 가 전시되어 있는 뤼미에르 박물관, 직물 박물관, 폴 보퀴즈 시장 등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일상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한다. 아름다운 풍광과 볼거리에 보태진 프랑스 와인과 맛있는 음식으로 인해, 그야말로 시각과 미각 등 오감을 즐겁게 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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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앤은 정해진 시간에 파리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자크의 방식도 괜찮을 뿐 아니라 삶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눈코 뜰 새 없이 목적만을 위해 달음질하는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짜인 스케줄과 계획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꿀 것이다. 쓸데없는 짓 말고 예정대로 목적지 파리로 곧장 가자는 앤에게 자크는 "Paris can wait"라고 대답하는데,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절묘하게 드러나는 명대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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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


자크가 앤에게 '행복하냐'라고 묻자, 그녀는 결혼생활이 나쁘지 않다고 대답한다. 앤은 전체적으로 그냥 무난한 인생이 불만스럽지는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자크는 인생의 행복이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면서 순간순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바로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파리라는 목적지에도 계획대로 제때 도착하려고 하지 않고,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과 맛있는 음식, 와인을 즐기도록 앤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다. 귀가 아프던 그녀는 어느 틈에 귀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온전히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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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보는 이에 따라 유부녀를 유혹하려는 느물거리는 바람둥이 프랑스 남자와 지루한 일상에서 로맨틱한 일탈과 자유를 꿈꾸는 여자의 뻔한 로맨스로 볼 수도 있다. 특히, 결혼한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가 자크 같은 남자와 함께 있다면 마이클처럼 근심이 많을 것 같다. 영화를 이런 스토리 라인으로만 보면, 중년 남녀의 시시껄렁한 바람으로 읽힐 수도 있다. 두 사람이 파리에 도착한 밤 키스를 진하게 나누고, 다음 날 자크가 보내온 장미꽃 모양 초콜릿을 씹는 앤이 미묘한 미소를 지음으로써 영화는 알듯 모를 듯 여운을 남긴다. 그녀가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 것인지 그걸로 이 로맨스가 끝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편과 자식만 보고 살아온 그녀의 삶이 자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찾게 될 수도 있고, 이제껏 살아온 대로 안락한 현실에 안주할 수도 있다. 둘 다 인생의 선택이다.


앤은 일반적인 통념으로 볼 때, 착하고 괜찮은 여성이다. 한편, 그녀를 은근히 유혹한다고 해서,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고 순간순간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프랑스인 자크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생의 진리는 섣부른 윤리적 가치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앤이 곧장 파리로 갔더라면, 그래서 삶의 여백을 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 짧은 순간순간에 살아있음의 즐거움들을 경험하지 못한 채 스쳐갔을 것이다.


영화는 정신없이 바쁘게 인생길을 직진하는 것에서 잠시 벗어나, 맛있는 것을 먹고 향긋한 깊은 풍미의 와인을 마시며, 숲에서 한가한 소풍도 즐기면서 천천히 돌아가는 인생의 행복에 대해 일깨워준다. 부유하고 성공한 남편과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감도 없고 자신이 뭘 원하는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도 모호한 여자와, 돈에 쪼들리면서도 소소한 삶의 즐거움을 결코 놓치려 하지 않고 다 챙겨 먹는 남자. 인생은 정답도 없고, 사는 방법, 가치관이 다양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 살아 있는 한 지금 이 순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은 인생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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