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원제 '앙상디 Incendies'는 프랑스어로 '큰 불, 화재, 전란'이란 뜻으로, 중동의 종교 이념 전쟁의 폭력 속에서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여자의 운명을 한 단어로 집약하여 표현한 단어이다. 2010년, 캐나다 감독 드니 빌뇌브 Denis Villeneuve가 레바논 출신 작가 와이디 무아와드의 희곡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중동 어느 나라로 설정한 채 지명을 명시하지 않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 갈등으로 참혹한 내전에 있던 레바논을 배경으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잔느는 엄마 나왈과 함께 수영장에 간다. 그리고 엄마가 갑자기 의식을 잃는다. 엄마가 물속에서 한 남자의 발뒤꿈치에 세 개의 점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확인한 순간 기절한 것이다. 무언가에 정신적 충격을 받고 실어증에 걸린 나왈은 결국 딸 잔느와 아들 시몽에게 그들의 생부와 형제를 찾아 편지를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그동안 남매는 그들의 아버지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알고 있었고, 다른 형제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터라 충격을 받지만,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기로 한다.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중동 어딘가의 나라로 떠난 남매는 그녀의 참담한 과거를 알게 된다.
기독교 집안인 나왈이 팔레스타인 출신의 이슬람교도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임신까지 하자, 남자 형제들이 그를 총으로 사살해버린다. 그녀의 할머니는 나중에 아기를 찾기 위한 표식으로 발꿈치에 점 세 개의 문신을 한 후 아기를 고아원에 보낸다. 그리고 나왈은 도시로 가 대학에 다닌다. 지성인이 된 나왈은 아들이 맡겨졌던 고아원을 찾아 나서지만, 도중에 기독교 민병대의 끔찍한 민간인 학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분노한 그녀는 정부의 기독교 지도자를 암살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나왈은 악명 높은 기독교 민병대 감옥에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고문 기술자이자 살인 기계로 유명한 아부 타렉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다. 강간으로 인해 쌍둥이 출산한 나왈은 15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다.
이제 말로 옮기기 힘든 끔찍한 비밀이 밝혀진다. 나왈이 수영장에서 만난, 점 세 개의 문신을 갖고 있던 그 남자는 아부 타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왈을 고문하고 성폭행한 그 아부 타렉은 그녀의 아들이자 잔느와 시몽의 아버지였다. 이로써, 전쟁이 빚어낸 비극적인 퍼즐은 다 맞춰졌다.
현대판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근친상간 incest은 인류의 오래된 금기이다. 사람들이 입에 담기조차 소름 끼쳐하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측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근친상간을 기록해왔고 사회는 이를 최악의 죄로 단죄해왔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반대쪽 성의 부모에게 성욕을 느끼지만, 엄격한 사회적 금지 때문에 억압된 것일 뿐이라고 분석한다. 한편, 근친교배가 유전자 풀 pool의 다양성을 줄여 생존에 불리하고 유전 질환의 위험을 높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근친상간을 터부시 한다는 생물학적 분석도 있다.
근친상간에 대한 분석이야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이 단어는 대명천지에 어느 누구도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어둡고 참담한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은 것을 알고, 죄를 뉘우치기 위해 두 눈을 뽑아버리고 죽을 때까지 방랑을 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이 참혹한 고통을 차마 견디지 못해 목을 매 자살을 한다. 그러나 이는 신들의 농간으로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그의 운명이었으므로 사실 그의 죄라고 할 수는 없다.
딸 안티고네와 함께 방랑하는 눈먼 오이디푸스
그럼 현실판 오이디푸스인 나왈의 아들 아부 타렉은 어떤가. 잔느와 시몽은 아버지이자 형제인 그를 찾아가 어머니의 편지를 건넨다. 나왈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일그러지는 얼굴 표정은 관객들에게 증오심보다는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는 살인을 하고 고문했으며 심지어 성폭행까지 했다. 씻을 수 없는 죄이긴 하지만, 온전히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그를 단죄하기 전에, 종교 전쟁의 아수라 속에서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미쳐갔고,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원의 어린 소년은 그 광신도들에 의해 살인 기계로 길러졌음을 먼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토록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애타게 찾았지만, 어린 소년에게 주어진 것은 증오와 폭력에 대한 학습뿐이었다.
그 역시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던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항하는 인간의 실존적 의지
나왈이 아부 타렉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넌 사랑으로 태어났단다. 그리고 네 동생들도 사랑으로 태어났단다." 한편, 잔느와 시몽에게는, "얘들아, 이 이야기의 시작이 어디일까.그 시작이 너희가 태어난 순간부터라면 슬픔이겠지.하지만 이야기의 시작이 너희들의 형, 혹은 오빠가 태어난 순간부터라면 이 이야기는 사랑이란다."라는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아버지이자 형제를 찾으라고 한 이유는 분노의 끈을 끊기 위해서라고 말한다.감독은 폭력에 대한 모든 분노와 근친상간의 처연한 상처까지도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폭력과 상처로 얼룩진 인생이지만, 나왈은 죽어가면서 세 명의 자식이 모두 사랑으로 태어난 고귀한 생명들임을, 그리고 그들이 사랑의 결과이므로 소중한 존재임을 강변하는 것 같다. 전쟁의 끔찍한 참화를 이런 식으로 극복하려는 나왈의 실존적 의지는 참으로 고고하다. 그녀는 15년간의 끔찍한 감옥 생활에서도 폭력과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늘 노래를 부르며 저항의 의지를 보였고,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했다. 나왈이 자식들에 대한 비극적인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녀의 정신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사랑의 결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의미 있고 귀한 존재들임을 믿으려 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묻어두는 것이 나았을까?
그러나 한편, 과연 남겨진 세 사람이 이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왈과 반대로 <올드보이>의 주인공은 근친상간을 비밀로 남기는 선택을 했다. 때로는 진실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진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의 고통과 죄책감으로 인한 엄청난 감정적 소모는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쌍둥이와 첫아들에게 남긴 두 장의 편지는 진실을 알리고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왈의 모성이 보여준 사랑과 용서, 화해의 메시지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지의 어머니 Mother goddess를 연상시킨다. 대지의 어머니가 만물을 키우고 돌보듯, 모성은 폭력과 잔혹의 역사까지도 모두 품을 수 있는 위대한 것일까? 감독은 모성을 지나치게 신성시하고, 여성에게 과도한 초인적인 강인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이미 분노의 끈을 끊었다. 이제는 너희들의 차례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 명의 자식들, 서로 간에 부모 자식이자 형제인 세 사람은 어떤 식으로 화해하고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
인간에게 있어 '의미'란?
그녀가 남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밝힌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영원한 비밀로 묻은 채 자신만의 고통으로 모두 떠안고 갔어야 했는지 섣부른 가치 판단은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인생의 의문 부호로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인간의 삶에 정답은 없지 않은가.
인간은 어떤 상황이든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나왈은 눈물자국으로 이어진 그녀의 가혹했던 삶으로 인해 사는 동안 항상 음울하고 어두운 여인이었다. 잔느와 시몽에게도 사랑을 주는 따뜻한 어머니라기보다는 항상 우울한 어머니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강하고 위대한 대지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버텨내기 위해 의미를 찾아 헤맨 나약한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과 화해는 그녀가 필사적으로 추구했던 하나의 '의미'가 아닐까? 편지의 존재는 그 '의미'를 놓치지 않고 움켜잡으려고 한 몸부림에 불과했는지도. 따라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모성의 위대한 승리로 간단하게 결론짓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녀는 어쩌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고통을 이기기 위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어 생명을 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주의 진실을 연구한 스티븐 호킹 같은 과학자는 우주는 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언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이 그저 우연의 산물로 만들어진 것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삶의 의미가 없고, 심지어 부조리하기조차 하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삶의 의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붙잡을 수 있는 '의미'가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