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카유보트는 파리의 복잡한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센강변의 프티 젠빌리에(Petit Gennevilliers)에 아예 정착해 정원 가꾸기에 몰두했다. 프티 젠빌리에의 집은 카유보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요트를 타고 정원을 가꾸며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는 친구인 클로드 모네와 씨앗과 비료, 식물 배치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나누며 협업을 할 정도로 정원에 진심이었다. 카유보트는 모네가 지베르니가 그랬듯이 직접 정원을 설계하고 가꾸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원은 분명히 다른 방향을 지향했다. 모네의 지베르니가 물과 반사를 통해 감각적이고 몽환적인 인상을 만들어냈다면, 카유보트의 프티 젠빌리에는 직선적 구도와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보다 구조적이고 현대적인 공간을 형성했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자연을 다루는 방식 자체에 대한 서로 다른 미학적 입장이었으며, 카유보트에게 정원은 곧 회화적 실험을 위한 ‘아방가르드한 장치’였다.
프티 젠빌리에의 정원은 카유보트에게 단순한 거주 공간이나 취미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기술·회화를 통합하는 실험의 장이었다. 그는 자동 스프링클러 시스템과 대규모 온실을 설치하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인 방식으로 정원을 설계했으며, 식물이 가장 효과적으로 자랄 뿐 아니라 가장 아름답게 ‘보이도록’ 환경을 구축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단순한 원예 애호가가 아니라, 자연을 공학적으로 조직하는 설계자였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요트 설계에 능했던 그는 정원의 동선과 구조를 구성할 때도 공간의 균형, 시선의 흐름, 색채의 대비를 치밀하게 계산했다. 이 정원은 곧 자연을 재현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성된 ‘근대적 풍경’이자 회화를 위한 장치였다.
카유보트가 이러한 실험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자산가인 그는 생계를 위해 작품을 판매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하며 인상주의 운동을 후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작품은 시장에 많이 유통되지 않았고, 상당수는 사후에 국가에 기증되거나 가족에 의해 보존되었다. 결과적으로 프티 젠빌리에에서 제작된 정원 회화들은 상업적 목적과 상관없이, 작가 자신의 관심과 실험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프티 젠빌리에의 정원은 카유보트에게 “자연을 스스로 설계하고, 그 결과를 가장 현대적인 시선으로 다시 그려내는 하나의 총체적 프로젝트였다. 그곳에서 그는 화가이자 설계자, 원예가이자 실험가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구현했으며, 붓꽃과 히아신스, 달라아가 어우러진 정원 풍경들은 이러한 시도가 회화로 응축된 결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