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 어린 왕자(le petit prince)
꽃의 여우짓은 작품의 아름다움과 명성에 의해 가려져 있습니다. 처음 모습을 보일 때부터 꽃은 한참을 뜸들이며 몸단장을 합니다. 빈틈없이 치장해놓고도 꽃은 지어낸 하품을 하며 말합니다. "아! 간신히 깨어났군... 죄송해요... 지금까지도 머리가 온통 흐트러져 있어요..." 완전 여우입니다. 어린 왕자의 칭찬은 빠짐없이 주워먹고 넌지시 필요한 걸 이야기하며 얻어낼 걸 얻어냅니다. 가시 자랑은 아주 가관입니다. "큰 발톱을 가진 호랑이들이 덤벼도 아무렇지 않아!" "이 별엔 호랑이 따윈 없어. 더구나 호랑이는 풀을 먹지 않아요." "난 풀이 아니예요." "미안해..." 생텍쥐페리가 심하게 데이고 작품을 쓴 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꽃이 주는 달콤함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걸려든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은 그 사람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까요? 어린 왕자는 꽃을 평가하며 별을 떠났지만 꽃과 헤어지고나서야 꽃이 주던 향기와 행복의 빈 자리를 깨닫습니다. 사랑은 그가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로 인해 감사와 행복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었습니다. 꽃의 변덕스러움과 정숙하지 않음이 실제와 다르게 소문나지 않은 건 생텍쥐페리가 그린 사랑이 상대방의 행동이나 가치관, 인격의 높고 낮음에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난 절대 도망치지 않았어야 해. 대단치 않은 그 심술 뒤에는 깊은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 어린 왕자가 꽃을 꽃답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작품에 꽃이 등장하는 장면은 세 차례입니다. 어린 왕자의 꽃이 우연히 찾아와 봉오리를 트고 또 홀로 남은 장면, 뱀을 만난 다음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마주친 하찮은 꽃 한 송이, 그리고 어린 왕자를 왜소하게 만든 장미꽃 정원입니다. 어린 왕자는 다른 꽃들을 보며 자기의 꽃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하찮은 꽃에게는 길을 묻고, 장미꽃 정원에서는 자신이 작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꽃은 이미 한 송이였습니다.
어린 왕자는 많은 별들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지구에서도 역장과 알약을 파는 상인, 뱀과 꽃과 여우를 만났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그가 다른 이들보다도 낫다고 생각했던 가로등 켜는 사람과 여우입니다. 여우에 비하기엔 가로등 켜는 사람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자기 외에 다른 것을 보살피는 사람이라며 그를 인정하는 어린 왕자의 말에는 하루하루 별을 돌아다니며 바오밥 싹을 뽑고 꽃에게 바람막이를 씌워주던 그의 다정함과 책임감이 떠오르고, 생텍쥐페리의 다른 작품인 「야간비행」까지도 생각나게 합니다. 여우는 이와 다르지요. 여우는 성실하지도 누군가를 위해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어린 왕자의 꽃이 생각나지요? 여우는 습관이 되었습니다. 습관이 되어주는 법을 알려주고, 습관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의 꽃의 거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습관이 되어버린 꽃과 어린 왕자와 달리, 여우는 처음부터 습관이 되는 길을 알려주고 어린 왕자를 기다려줍니다. 꽃의 속마음을 들어버린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바람에 흩어지는 밀밭을 보며 어린 왕자의 금빛 머리칼을 떠올릴 겁니다. 둘은 습관이 되었으니까요. 아저씨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어느 즈음에 어린 왕자의 별이 있을지를 가늠해보다 결국 포기할 겁니다. 어느 별이든 다 아름다울테니까요. 꽃은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보았고, 어린 왕자도 자기의 꽃을 생각하며 매일 밤을 기다렸습니다. 꽃이 사라지면 모든 별들이 빛을 잃습니다. 꽃이 정숙한지 변덕스럽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우는 성숙하지만 사랑은 꽃과 어린 왕자 사이에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 많은 습관들 사이에서 사랑을 꺼내게 해줄까요. 꽃이 어린 왕자를 떠올리며 그 사랑에 이유를 물었을까요?
「어린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신동운(옮긴이), 청목,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