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좀 건너다녔을 뿐인데

김민정 시인, 미혼과 마흔

by 김세종

숨은 단어는 기혼입니다. 뭘 가지고 나오기 어려운 시입니다. 눈앞에 대고 시를 흔드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다른 많은 즐거운 시들 중에서 이걸 가지고 나온 건 신호등 좀 건너다녔을 뿐이라던 마지막 문장 때문입니다. 제목을 두고 갈등했습니다. '뭘 째려 이 쌍년아'와 '신호등 좀 건너다녔을 뿐인데' 중에서 고민했습니다. 시집 전체를 이야기하자면 앞의 것을 썼을텐데, 이 시만 들고오자니 결국 뒤의 것을 집어들었습니다. 문장 전체를 쓸까 고민도 했는데 그래도 시집을 이야기하자면 쌍년에서 끊어야 합니다.


역시 숨은 단어는 기혼입니다. 마흔에 마주선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를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시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가만히 다시 읽게 됩니다. 끽동 언니는 이 시 때문에 평생 살아남아 시인과 독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깔끔한 결말입니다. 거추장스럽지 않게 시인은 끽동을 불렀다가 학익동 새 아파트 단지로 옮겨져 시를 마무리지었습니다. 거참 신호등 좀 건너다녔을 뿐인데 말입니다.


저는 산문시를 읽기를 힘들어합니다. 폐활량이 모자란지 숨이 차고 졸음이 옵니다. 요즘 시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제가 한창 시를 읽던 2000년대말 2010년대초는 산문시가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거기 질겁해서 조지훈 시인의 낙화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그랬습니다. 시의 뒷이야기는 시집 속 다른 시들에서 찾아야 합니다. 한 편 시들이 저마다 작은 조각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을 추적하는게 독자의 일은 아닙니다. 그녀가 한번 흔들고 떠났으니 아직 마흔이 안 된 저로서는 '에이, 설마' 하며 뒤따라갈 뿐입니다.


미혼과 마흔



학익동이요 했는데 택시에서 내리고 보니 끽동 길한복판이었다 쉽게 불러요 쉽게 부르지 그렇게 불려온 40여 년 동안 어둠 깜깜할수록 빨강으로 더 환해지던 옐로 하우스의 안마당, 입대 전날 아빠의 동정도 머뭇거리다 여기 와 묻혔다는데 지금이라도 캐갈 수 있을까요? 돌아봤다 돌이 된 엄마가 돌아보지 마 신신당부했거늘 떨어뜨린 문학개론 주우려다 눈이 마주친 끽동 언니는 하이힐 끝으로 책장 위에 올라선채 이렇게 말했다 뭘 째려 이 쌍년아, 너도 인하대 나가요지? 길 하나를 맞각으로 캠퍼스 저 푸른 잔디를 담요 삼아 끽동 언니들은 짝짝 껌을 씹어가며 딱딱 화투장을 쳐댔고 그러다 간질거려 죽을 지경이면 뒷물 세숫대야를 들고 나와 지나가던 여대생들을 향해 뿌려대곤 하였다 쟤들이 젤로 재수 없어 퉤, 침뱉었지만 물 마르기 전에 물 뿌리기 바쁜 끽동 언니들의 목마름이란 그 가래도 아까워라 자갈처럼 나날이 입 다물어야 했는데 세라복을 입은 채 놀다가, 웬 사람의 팔을 잡아끌 때 그 땀방울도 아껴라 잠시도 장독대처럼 일어날 줄 몰랐는데 어느날 끽동이요 했는데 택시에서 내리고 보니 학익동 새 아파트 단지였다 신호등 좀 건너다녔을 뿐인데 말이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김민정 시인, 문학과지성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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