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기 열일곱째 날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며 아들 탓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제는 새벽에 잠이 들었습니다. 학생들 평가 외에 빨리 추진해야 될 업무가 있는데 미루고 미루었거든요. 올해 처음 해 보는 업무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위원도 정하고, 회의도 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가 있음에도 계속 미루기만 했습니다. 27년째 교사를 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업무는 항상 두렵습니다.
두려움에 50쪽이나 되는 공문을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방치했습니다. 계속 일을 미룹니다. 덕분에 화장실 청소부터 바닥 닦기까지 잘하지 않던 집안일을 열심히 해서 모처럼 집이 깨끗해졌습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을 직면하지 않고 청소나 잡다한 일로 회피를 하루 종일 했습니다. 결국 종일 보지 않던 드라마까지 시청합니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자리에 앉아 공문을 읽기 시작합니다. 막상 읽어보니 조금 골치는 아프고 성가신 일들이 잔잔하게 많지만 못할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일찍 시작하지 않아 제 때 추진해야 될 일들이 추진되지 않은 것도 보입니다.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됩니다.
두려움을 회피하고 직면하기 싫어하는 엄마입니다. 제 모습을 아들이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남편에게 당신 닮아 저 모양이라고 듣기 싫은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아들은 오히려 저를 닮았네요.
저는 그런 성향을 나름 극복하려고 무던히 노력해 왔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절 대신해 뭔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 아들은 직면하고 노력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듯합니다. 먹고살만한 집에 태어났고 엄마는 알아서 원하는 걸 해줬으니까요. 설사 고집 피우고 온갖 이해 못할 행동으로 얻어낸 것이라도 결국 엄마가 먼저 굴복하고 아들 말을 들어줬으니까요.
아들이 저렇게 된 것도 강한 척 하지만 유약한 엄마가 양육과정에서 갖가지 실수를 범한 제 탓입니다. 그것마저 저를 닮은 아들이네요.
그저 평범하게라도 커 줄 거라 생각했지 이런 날들을 맞이하게 될 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제 많이 먹었는데도 배가 고픈지 아들은 아침을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 반찬을 쓱 살펴보긴 하지만 불만을 표하진 않습니다. 다행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늘 마음속으로 핑계만 됩니다. 이런 모습도 은연중에 아들이 닮은 건지도 모릅니다. 잠재적으로 학습되었을 겁니다.
지나간 실수를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될지 아직은 방향이 서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요. 정신을 차리고 고민을 좀 더 해야 되는데 늘 우선순위는 딴 곳에 있으니 우선순위부터 바꿔야 될 아직 정신 못차린 엄마네요.
"00야, 안아줘. 오늘 밥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우리 00은 늘 맛있게 먹으니 고맙다. 엄마가 미안하고 사랑해. 학교 잘 다녀오자."
오늘은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지나온 시간이 미안하고,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버린 모든 상황들이 미안합니다. 늘 아들 탓만 하고 있었던 상황들이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