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잘 안 통하는 문제아를 키우다 보니 아이들의 심리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 본다. 그동안 읽은 책들 중 머릿속에 남은 지식과(사실 별로 남은 게 없는 게 현실.) 어쭙잖은 나의 판단과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서 말이다.
우리 반에는 사차원이라고 불릴 만한 아이가 하나 있다. 여학생 JW.
동생이 둘이나 되는 맏딸이다. 학기 초에는 뭔가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눈물을 흘려 걱정이 되었다. 상담에 찾아온 엄마도 걱정을 많이 하셨다.
1. 급식이 끝나면 달려와 안긴다. - 맏이로 덜 받는다고 느끼는 사랑.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물론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주변을 맴돌긴 하지만 보통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주변에 와서 말이 많다. JW는 그렇게 말이 많은 스타일도 아니고 내 주변을 맴도는 아이도 아니다.
30명 아이들 중 5명만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기가 곤혹스럽다. 친절하게 대답하고 응대해 주고 공감해줘야 하니까. 소음 속에 잘 들리지도 않는 말들을 무슨 영어리스닝 하듯이 듣고 있어야 된다. 잔뜩 귀 기울여. 아이들이 재미있게 웃으며 하는 이야기가 사실 재미는 없다. 하지만 호응해 줘야 된다. 아이들은 신나서 하는 이야기니까. 영어 리스닝 같은 아이들 주변 이야기 듣기를 한 판 하고 나면 한마디로 진이 다 빠진다.
JW는 그런 면에서 나를 편하게 해 주는 아이다. 그런데 이 아이의 특이한 행동. 급식 먹고 나오면 뒤에서 달려와 나를 콱 끌어안는다. 안는 게 안되면 손을 꽉 잡는다.
헷갈린다. 이 아이와 무슨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밀당을 하는 것도 아니고 평소엔 별 관심도 안 주던 아이가 왜 밥만 먹고 나면 와서 안기고 손을 잡는 것인가? 밥을 먹고 나면 괜스레 풍채 좋은 담임 선생님 품이 생각나는 건지.
아이가 맏이로 자라다 보니 사랑을 동생들한테 뺏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으리라. 그래서 아무도 선생님을 차지할 수 없는 급식시간이 좋은 모양이다. 꼭 급식시간밥을 먹고 교실로 향하는 그 순간에만 그러는 걸 보면. JW야, 사랑에 목말랐구나. 그래 다음에도 안기면 꼭 안아줄게.
2. '조용히 학습하기'선물 달라는 선생님에게 선물 주기 싫어요. -자아정체성이 너무 강하다. 관종.
아이들에게 선생님한테 줄 수 있는 큰 선물을 이야기했었다. 돈도 들지 않고 힘도 들지 않은 선물. 조용히 하면서 과제를 끝내는 것. 아이들은 저마다 선물을 주겠다고 난리다. 그 와중에 도드라지는 JW 목소리
"선물 주기 싫은데요."
꼭 이런 아이들이 있다. 그냥 평범함 속에 묻히면 되는데 도드라지는 아이. 저런 아이들은 왜 저럴까 싶은데 그냥 내 맘대로 해석한다. 관종.
관종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데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 JW는 관심받고 싶은 게 분명하다. 그리고 자아정체성도 너무 강하다. 관심도 받아야겠고 자신의 존재도 드러내야겠고. 상대방이 그 말을 기분 나빠할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말. 한마디로 자기가 젤 소중한 아이다.
3. 놀아주세요. - 선생이 친구인 줄 아는 과도한 친화력.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보드 게임을 들고 온다.
"선생님, 이거 가지고 놀아주세요."
"선생님, 바쁜데. 안되는데."
"치, 선생님, 나쁘다."
당황, 황당. 반백년 살아온 내가 네 눈에 친구로 보이는구나. 평소 내가 처신 잘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보드게임도 싫고 쉬는 시간에 너희들처럼 쉬고 싶단다. 에너지가 없다. JW야.
선생님이 본인 친구라고 생각하는 과도한 친화력. 그런데 정작 또래친구는 없다. 선생님한테 말도 잘 걸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것이 부끄러움이나 긴장감이 하나도 없건만 또래 친구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을 나이에 맞게 대할 줄 모르는 우리 JW. 그냥 모든 사람들을 자기 좁은 시선 안에서만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말 왜 저러는 건지 누가 가르쳐 주면 좋겠다.
4. 한 번 일어나 보세요. 아, 이렇게 생긴 옷이구나. - 공주가 되고 싶거나 아가씨가 되고 싶은가 보다.
청치마에 하늘색 니트를 입고 출근했다. 청치마는 사선으로 똑 단추가 장식으로 달려 있었다.
JW 눈에는 신기했나 보다. 당돌하게도 말한다.
"선생님 일어나 보세요."
일어나고 나는 게 끝이면 좋으련만.
"선생님 돌아보세요."
아 이 정도면 당황의 끝판왕이다. 꼬맹이를 혼내기도 뭐 하고 순간 판단력을 잃고 헤매는 나는 그 아이가 시키는 대로 다하고 있다. 0선생.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니?
나름 패션에 신경 쓰는 아이다. 머리띠도 자주 바꾸고 샬랄라 드레스도 자주 입는다. 엄마의 바람인지 아이의 바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담할 때 본 엄마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수수한 옷차림이었던 걸로 보아 아이가 아마 공주과 기질이 강한 거 같다.
JW야, 공주가 되고 싶은 거니? 선생님 패션에 관심이 너무 많구나. 아니면 선생님처럼 세월을 훅 건너서 어른이 되고 싶은 거니? 어른 돼서 좋을 거 하나도 아니 별로 없단다. 밥벌이도 고단하고 자식 키우기는 험난하고 조난당할 것만 같은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선장 같은 느낌이란다.
네가 뭘 알겠니? 아무튼 선생님 패션이 나름 이뻐 보였단 거지? 그래서 이해하고 넘어가주마.
매번 반복되는 비슷한 유형의 아이들이 교실에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은 생긴 것도 비슷하답니다. 그래서 인상이란 게 틀린 것만은 아닐 겁니다.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오랜 생활 교사를 하면서도 아이들 심리도 제대로 못 파악하고 엉망진창이네요. 0선생, 방학 동안 공부 많이 해야겠습니다.
어찌 됐든 때론 힘들게 하는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이 있어서 저는 밥 먹고 살고, 집에서 있었던 서글픈 일도 잊고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밥벌이는 지겹지만 반복되는 아이들의 행위도 때론 지겹지만, 지겨움이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있으니 하루하루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이 지겨움이 곧 행복이란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