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개명을 한대요.
De Gary Kerr

행복이 별 거 있나요? 유치한 장난도 행복이랍니다.

by 나무 향기
출장 후 싸웠는데 개명 이야기로 둘이서 이틀 동안 생각날 때마다 웃고 결국 화해했습니다.

긴 출장을 마치고 남편이 돌아왔다. 집에서 잠시 기절을 맞보았기에, 멀어지면 온전히 남이 될 남편이지만 현재는 가장 가깝다고 느껴지는 사람이기에, 위로받고 싶었다. 아픈 다리를 끌고 역에 마중을 나갔다. 왼쪽이 아파서 다행이었다. 항상 마중을 나가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많아 기차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더니 차를 발견하고 트렁크 문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짐을 싣고 차에 탄 남편에게 나이에 안 맞는 응정을 부렸다.

"문자 못 봤어? 많이 아프고 놀랐다고."

"응."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순간 속상함이 밀려왔다.

"아픈데 위로도 안 해?"

"아, 긴 비행시간에 피곤해서 그렇지."

잠시간의 깊은 서운함으로 근 한 달 만에 본 남편과 소소한 말다툼이 일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넓은 마음을 내자고 늘 다짐하지만 순간순간 오르는 사소한 섭섭함은 수일간의 다짐을 몇 초만에 허물어뜨리고 만다. 3일 전 일이지만 자세한 경과는 기억나지도 않고 결국 마음 한구석은 엄청 서운했다는 사실만 남아 있다.


긴 출장 끝에 남편과 여행을 가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토요일 속초로 떠나는 여행.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는 잔뜩 들떠 있었다. 아이들 식사 때 맞추느라 어디 갈 엄두도 못 냈던 상황이라 돌밥을 피해 남이 해 준 밥을 먹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기만 한 여행에 대한 기대였다.

전날 싸운 일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싸움에서 주도권은 늘 남편이 쥐고 있었다. 성격 급한 나는 누가 입을 다물면 견디지를 못한다. 남편은 싸움이 일어나면 늘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물론 주관적 견해다.) 먼저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이번엔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침에 안 간다는 의사를 표시하려다 일단 씻고 준비를 했다. 남편이 말을 걸어도 한 마디도 안 하고 따라나섰다. 속초까지 가는 시간은 5시간이 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침묵시위를 이어나갔다.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동료선생님들 중에는 남편과 다투고 서로 한 달 동안 말을 안 한 분도 있던데 그런 일은 나에겐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나 마찬가지인데 5시간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섭섭함도 컸던 것이다. 남편의 피로감도 이해되지만 온전히 사랑받고 싶은 아기 같은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은 모양이었다.


속초에 도착해서도 한 동안 말을 않다가 숙소 근처 바닷가 산책을 하며 결국 마음을 풀었다. 겨우 6시간이 이선생의 한계다. 다음엔 하루를 버텨보리라. 물론 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이지만.

맥주 한 잔 곁들인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 남편이 화장품 선물을 내밀었다. 미란다 커가(MIRANDA KERR) 운영하는 회사의 슬리핑 마스크였다.



"출장 갈 때마다 000이라는 영어 이름 쓰잖아."

"응. 그런데 뭐?"

"이름을 이참에 바꿀까 싶어."

"뭐 하러, 이때까지 만났던 사람들한테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쉽나? 거기다 명함도 다시 파야 되고."

"그래도. 왠지 바꾸고 싶어 지네."

"참. 이해 안 가네. 뭐 대단히 멋진 이름이라도 지어낸 거야?"

"응."

"뭔데?"

"미란다 커를 보니까 생각이 났어. 일단 커~어~ㄹ(Kerr)를 넣을 거야."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

"개리(GARY)로 할까 싶어. 개리 커~어~ㄹ."

자꾸 커 발음을 굴리라고 발음이 그것밖에 안되냐고 핀잔을 준다. 그래서 커~어~ㄹ로 표기해 본다.

"그냥 원래 이름대로 해. 개리 커는 웬 뜬금포."

"뭔가 미국 이름 같기도 하고 프랑스 이름 같기도 한 걸로 지어보려고. 그래서 이름 앞에 드(De)를 붙여볼까 해."

"드 개리 커? 뭐야. 이름도 길기도 하고 한국인이 뭐 성까지 바꾸면서 뭐 하자는 건데?"

"왜 멋있잖아. 발음해 봐. De Gary Kerr."

정말 뭐 하자는 남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열심히 들어줬다.

"그냥 살아. 뭐 하러 그런 이상한 이름으로 바꿔. 발음조차 힘들다. 그전 이름이 더 나아."

"아니 바꿀 거야."

남편은 고집을 피운다.


"De Gary Kerr. 여보 이거 독일식 발음으로 살짝 다르게 한 번 읽어봐."


"드 개리 커,

드 가리 커?

데 가리 커?

대가리 커? 푸하하. 하하, 흐흐, 푸하하."


그렇다. 남편은 나를 웃기려고 작정한 것이었다.

대가리 커?

그렇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싯구가 생각난다. 목이 긴 동시에 대가리가(죄송합니다. 이 표현은 사람에게는 안 쓰지만 대화상 어쩔 수가 없네요. 양해 바랍니다.) 살짝 커서 슬픈 우리 남편은 모자도 잘 맞는 게 없다.


한바탕 둘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 나이에 장난치는 모습은 젊은 애들이 본다면 민망하지만, 또한 장난의 소재도 다소 유치하지만 어떠랴. 그냥 웃을 수 있으면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부터 우리 남편은 '드 개리 커~어~ㄹ'이다. 아니 '대가리 커'이다.


한 줄 요약 :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니 유치하지만 사소한 농담 하나로 서로를 웃게 하려고 노력하는 속에 행복은 생겨날 것이다.

대문 사진 :Pixabay

머리 큰 인형 쓴 사람들의 인형극 모여라 꿈동산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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