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일이 늘었어. 이러다 스마트폰 중독자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과의존에 대해서 교육하고 있으면서 정작 나는 폰을 쥐었다 폈다 무의미한 반복을 하고 있으니 바담풍 하면서 바람풍이라고 가르친다는 어릴 적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설탕이 든 믹스커피를 끊은 지 2일 만에 다시 달달함에 이끌린다.
불안이 몰려오나 봐.
작심삼일은 40퍼센트 정도는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작심 2일이 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네. 이런 나도 나겠지. 이제 나를 인정하고 편안하게 살기로 했으니까. 남한테 피해는 안 주고 살 테니까 이 정도면 됐어.
이틀 전 집 근처 호수를 걸었어. 근 1년 반 만에 가 보는 곳이야. 그동안 호수는 더 깨끗해지고 주변 상가들은 많이 바뀌었더라. 맛있고 친절한데 손님이 없던 베이커리 카페는 다른 가게로 바뀌었고, 임대가 되지 않았던 곳들도 가게가 들어섰어. 1년 반 동안 누군가는 눈물을 머금고 삶의 터전을 정리했거나 더 좋은 곳으로 갔거나 누군가는 꿈을 안고 가게를 시작했겠지. 산책을 하다 보면 바뀐 가게나 임대가 붙은 가게를 보면 마음이 아파. 돈벌이가 지겹다고 퇴직하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나를 반성하게 되지.
호수는 어떠냐고?
풀로 무성하던 호숫가도 풀을 싹 걷어내고 땅을 고르게 해 놓았더라고. 아마 무슨 건물이 또 들어설 모양이야.
인구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도시에 아파트는 왜 이리 많은 건지, 임대되지 않는 건물도 많은데 또 건물은 왜 이리 들어서는 건지. 그럼에도 변화가 있다는 건 도시가 살아 있다는 뜻이라 그동안 축 쳐져 있던 나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았어.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우리 동네로 넘어가는 지하도 앞에 서면 숨이 턱턱 막힌다. 열량을 소비하고 진짜 운동이 되는 시간으로 들어서는 건가 봐. 지하도부터 집까지 가는 길이 그 어떤 걷기보다 힘들게 느껴져. 산 정상을 향해 숨을 할딱거리며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길 때가 생각나. 아름다운 경치 구경만 기대하고 가는 산은 항상 걷는 과정에는 후회를 하게 되거든. 이 체력으로 산행을 하겠다고 온 거야 하며 나를 비웃게 되지. 정상에 가야 되니까 계속 걷듯이 집에는 가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걷게 돼. 지옥이 이런 걸까 하면서. 겨우 이런 일로 지옥을 떠올리니 어떻게 보면 내 삶도 평탄했던 가봐.
어쨌든 오랜만의 산책에 마음이 편안해졌어. 마음이 힘들 땐 무조건 걸으러 나가라는 말이 맞았어.
그래서 오늘도 걸었어. 걷기 전에 퇴근을 하고 산부인과에 갔더니 자궁경부암 검사가 비정형(맞게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이라는 거야. 의사 선생님은 다시 한번 조직 검사를 하제. 저질 체력에 아픈 것 같지도 않게 자주 아프게 된 나지만 뭔 이상이 있을라고 하며 가볍게 생각해. 의사 선생님은 열심히 설명을 했어. 비정형이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염증으로 인한 걸 수도 있지만 검사를 해 보아야 되는 중요한 점이라고 말씀하셔. 엄마 아버지도 아직 건강하시니 건강을 과신할 때가 많아.
의사가 볼펜으로 열심히 비정형, 염증, 암이라고 쓰며 동그라미를 그리며 설명하는 종이를 보며 속으로 생각하지.
'선생님. 과잉진료 하지 마시고요. 지난번에도 출혈을 멈추겠다고 호르몬 주사만 달랬는데 원하지도 않는데 공단에 전화하게 하고 암 검사 시키고 혈액검사까지 하셨잖아요. 불과 5개월 전에 혈액 검사 했다고 말씀드렸건만.'
스물스물 오르는 불신과 예만함에 선생님께 말했지.
"검사 안 할 거예요. 안 할래요."
의사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며 뭐라 뭐라 설명하시더라. 과잉 진료가 아니라면 이런 또라이가 있나 하셨을지도.
어떻게 됐냐고?
결국 염증 소독을 해야 된다면서 조직을 또 떼냈어. 모든 여자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산부인과는 정말 가기 싫은 곳이야. 남자들이 군대 가는 것만큼 싫지 않을까. 감히 비교하지 말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오늘은 아들을 태워주려고 했는데 시간을 넘겨버렸어.
고민을 해. 집에 가서 퍼드러질까, 집안일이나 할까, 호수를 또 걸어볼까.
공부 빼고는 혼자서 뭘 잘 못하는 나인데 다시 호수를 걸어보기로 했어. 호수 입구까지 가는데 20분 정도 걸린 거 같아. 해가 많이 짧아졌어. 호수에 닿으니 출발 때와 달리 어둠이 내려앉아. 혼자 걷는 것이 살짝 겁이 났어. 우습지? 50대 아줌마가 겁날 게 아직도 있다니.
호수공원이 조성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어. 호수를 가로지르는 제법 긴 다리에 LED 불빛이 파도치듯 들어온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불빛이 빠른 속도로 바뀌면서 무지갯빛을 내. 꽤 괜찮은 풍경이야. 퇴근할 때는 살짝 더운 감도 있었는데 해가 지니 조금 쌀쌀해.
내 마음은 어땠냐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밑에 출렁이는 까만 호수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저기에 떨어지면 밤이라 사람들도 못 알아보겠지?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빠지면 어떤 느낌일까? 휴대폰으로 구조 전화는 할 수 있을까? 나는 수영을 못하는데 그냥 끝인 건가?
아찔했어. 그냥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에 나도 겁이 났어. 그 와중에 휴대폰으로 전화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아직 세상에 미련은 남아 있나 봐.
다리를 걸어가는 게 힘들었어. 공황장애가 이런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복잡해지더라. 무서워서 얼른 언니에게 전화를 했지. 다행히 언니는 퇴근할 시간이었고 호수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언니와 통화를 하며 잡생각을 버렸다.
이제 밤에는 걷지 않아야겠어. 혼자 밤에 걷는 건 위험한 것 같다. 그럼 걷기는 언제 할 수 있을까?
어제는 수행법회가 있었거든. 나는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졸업하고 짝퉁 불교신자가 되었어. 큰 신념도 없고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떠내려온 쓰레기처럼 그저 휩쓸려 정토회 일반 회원까지 되었다. 불교에서는 전도를 전법이라고 하거든. 전법하시는 분들이 전법을 하려고 무지 애를 쓰셨지.
법회에서 스님이 말씀하셨어.
미래와 과거를 생각하는 건 괜찮은데 미래와 과거에 얽매일 때 스토리를 만들지 말라고.
스님이 오늘 나한테 진짜 필요한 말씀을 하시는구나 했어. 온라인으로 하는 법회다 보니 법회 때마다 딴생각에 딴짓을 하는 나지만 이렇게라도 법회에 참석하는 게 틀리진 않았구나 생각을 했어.
인간이 생각을 안 하고 살 순 없을 거고, 스토리를 만들지 말라는 말.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나는 항상 스토리를 무궁무진하게 만들어 내곤 하지. 그래서 남편도 힘들게 하고,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해. 아이가 어릴 때 내가 한 선택을 자책하고, 지나간 일 후회해 봐야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앞으로 스토리는 만들지 않으려고 해. 그냥 생각나면 거기서 끝. 생각의 문을 더 이상 열지 않으려고 해.
글을 발행하려는데 반 아이들이 옆에 온다. 고자질. 오늘도 고자질이야. 똑같은 고자질을 다른 아이들이 번갈아 가면서 해. 은근 그 아이가 나한테 혼나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봐. 얄밉지? 하지만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걸 느껴. 혼나도 1시간만 지나면 또 혼날 일을 만들고 혼난 것도 까먹고 마음에 남기질 않고 또 나한테 말을 걸어. 내 아이는 그렇지 못한 거 같아서 아이들의 부모들이 모두 다 나보다 나은 것 같아서 마음이 허해질 때가 많단다. 딱히 그렇지도 않을 텐데 말이야.
살아 있는 아이들 사이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오늘은 이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요 며칠 좀 살만한가 봐.
짧은 가을이 가기 전에 더 많이 걸으려고 해. 추워지면 추워서 운동 안 한다는 핑계를 댈 게 뻔하니까. 이틀 걸었으니 삼일도 되겠지? 작심 2일인 나였지만 나를 믿어보기로 해. 스마트폰도 멀리 해야겠어. 언행일치가 되는 선생님이 되고 싶으니까.
이제 생각을 멈추어야겠어.
편지도 그만 쓰도록.
그래도 제목이 편지니까 인사는 해야겠지?
건강해. 우리 나이엔 건강 챙기는 게 최고니까.
이젠 괜찮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