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죽어감에 답하다'(저자 엘리자베스 퀴볼러 로스)라는 책에 따르면 자살을 고려하는 환자들은 4가지의 유형으로 나뉘게 된다.
1.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한 환자
2. 자신에게 악성종양이 있고 '당신이 도움을 받으러 너무 늦게 왔기 때문에 의료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잔인한 말을 들은 환자
3. 투석을 받고 있는 환자.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 중 지나치게 많은 희망을 전해 받고 자신의 상태에 대해 믿을 수 없는 평가를 받은 환자
4. 무시당하고, 고립되고, 버림받고,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의료적, 정서적,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한 환자
이 4가지 유형을 보며 나는 이 4가지 가운데에서도 2가지로 묶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
2번과 3번, 1번과 4번이 같은 성향을 가진 환자 유형이라 볼 수 있다.
<2, 3번의 유형>
2번과 3번의 경우에는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가능성의 비중에 집중한다. 그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환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오히려 자살에 대한 확신을 마음에 한 번에 새기는 스타일이다.
<1, 4번의 유형>
1번과 4번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부터 이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부류의 환자이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부터 자살의 끝으로 자신의 몸을 이동하고 있는 중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의 확신을 미리 해둔 부류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2, 3번의 유형>은 자살을 고려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것에 한계가 많다. 그리고 마음의 변화가 한순간에 이뤄지기 때문에 그 찰나를 주변인들이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
<1, 4번의 유형>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위험한 상황임을 홍보하고 알린다. 그것을 우린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눈과 귀를 열어 환자에게 집중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충분히 개선의 여지는 열려있다.
그렇다면 <1, 4번의 유형> 환자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1.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한 환자
이 부류의 환자는 평소 고집이 센 사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거나, 본인의 예측에 벗어난 일정들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경쟁의 구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매번 계획된 삶을 산다. 자유로운 삶이 아닌 모든 것에 꼼꼼하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완벽주의자'를 치켜세워주는 세상에서 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상황과 사람을 통제하는 것에 익숙하다.
뭐 우리의 학교, 직장에서도 그렇지 아니한가.
하지만 본인의 마음대로 되는 세상은 없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불안은 계속 증가하고, 이 불안한 감정은 우울한 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이런 성격은 자기 자신을 더욱더 힘들게 한다.
주변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본인을 갉아먹는 모습을 보인다.
4. 무시당하고, 고립되고, 버림받고,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의료적, 정서적,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한 환자.
본인이 평상시보다 육체적, 감정적으로 몸이 나빠진 경우, 자기 컨트롤은 더욱더 힘들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 때, 영적인 도움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영적 도움을 받으러 가서도 우리는 영적인 도움을 받기도 전에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영적 도움을 받으려다 그 속에서 더 무시당하고, 고립되고, 버림받았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의료적, 정서적인 도움 역시 같은 한국 땅에서도 다른 수준의 도움이 존재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함에 따라 지역, 연령 등에 따라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준 자체가 달라진다.
한국 내에서 '도움 받음의 지수'를 볼 때, 선진국, 개발도상국으로 나뉘는 가슴 아픈 삶의 실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감정은 환자에 국한된 부분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무시당하고 고립되고 버림받은 감정을 느낀다. 난 단언컨대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일반인 VS 환자'로 설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감정의 정도는 1~2배가 아닌 수 백배가 넘을 테니...
그렇게 우리는 <1, 4번의 유형>의 환자를 고치기 위해 해답을 찾으려 애쓰지만 답은 없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답을 찾을 수 없다. 답이 발견했다면 벌써 다 해결되었겠지.
그렇다면 드는 의문점 하나.
의료적, 정서적, 영적 도움을 제대로 받는 사람은 존재할까? 또 결국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우리 모두는 후회하지 않을까?
'자살'이라는 이슈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연기자 이은주 씨의 자살 뉴스는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대학시절, 샤이니 종현 씨의 자살 뉴스 또한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직장 초년생 시절, 정치인 노회찬 씨의 자살 뉴스는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유명 가수, 연기자, 정치인, 지인들의 자살 이슈는 매년 일어난다.
하지만 당장 내가 그 상황이 아니고서는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깊게 고민해보지 않는다.
왜냐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든 나에게 다가올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본인 스스로와의 대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살'이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자살'이라는 부분을 단순히 부정적인 단어로만 규정하는 것이 옳은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자신의 고개를 숙이거나, 한숨을 크게 쉬며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하지만 오히려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살'이라는 행위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의사표시'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더 이상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
내가 불치병에 걸렸지만 아직 걸어 다닐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는 나의 의사표시'를 할 수 있을 때, '자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주변 가족들에게 더 이상 폐 끼치며 살고 싶지 않아 이런 선택을 했다면, 우리는 이 '자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자살'을 이분법적으로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사정과 사연은 각각 다르고 그 환자들의 마음의 무게 또한 우리가 정량적으로 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살'을 딱 한 줄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누군가의 부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잠시만이라도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묻고 답하는 문화가 생겨날 때 우리가 죽음, 자살에 좀 더 익숙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