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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Apr 13. 2022

갯벌의 조개잡이

한 장소에 머문다는 것의 의미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온 이후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서해가 가까이 있어, 대부분 한 시간 이내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작년에도 갯벌에 많이 갔었고, 서해의 다양한 갯벌은 해양 생물에 관심이 많은 둘째에게는 놀이터나 다름이 없었다. 


갯벌에 갈 때마다 인상적으로 관찰했던 것은 초보티 팍팍 나는 관광객들이 이곳저곳 호미로 삽으로 헤집어 바지락을 한 두 개 겨우 건지는 동안, 업력 200년은 되어 보이시는 할머니들이 슬슬 한 걸음씩 옮기시다가도 어느새 한 소쿠리 가득 바지락이며 꽃게며 소라며 고둥이며 채워 넣으시는 모습이었다. 오늘 다녀 온 제부도 매바위 갯벌에서도 업력 수십 년은 되어 보이시는 할머니 한 분이 엉덩이 방석을 두르시고 슬슬 굽은 허리 이끌고 호미질을 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평상 시 같으면 애들 쫒아다니느라 한 군데에 머물지 못 했었는데, 오늘은 왠지 그 분의 작업하시는 모습을 조금 더 오래 지켜 보고 싶었다. 내 흥미를 끈 부분은 다른 초보들이 여기저기 얕게 뻘을 헤집어 놓는 동안, 그 도사님은 한 군데 가만 앉으셔서 5분, 10분이 지나도록 계속 뻘을 고르고 또 고르시며 바지락과 동죽을 귀신 같이 찾아내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슬쩍 '어머니 조개 많이 캐셨네요.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이 나와요?' 라고 여쭤 보니, 알듯모를듯 눈으로 미소를 지으시며 '계속 훑다보면 이것저것 많이 나와요. 그런데 진짜 어장은 따로 있지.' 라며 계속 뻘을 골라내셨다. 나는 '진짜 어장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라고 여쭤 봤다. 그랬더니 '거기는 물이 빠지고 밤에 가서 캐오는 데라 사람들이 잘 몰라요. 저어기 매바위 왼쪽편에 기둥 세워둔 데가 그나마 좀 잡혀요' 라고 하셨다. 나는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많이 캐시는데 뭔가 요령이 있을까요?' 라고 여쭤 봤고, 그분은 '외지인들이 와서 조금 긁다가 가는데, 조금 더 긁고 살살 파내려가면 숨어 있던 애들이 나와요' 라고 하셨다.


뭐 흔해 빠진 '한 우물을 파야 전문가가 된다' 라는 이야기를 이런 짧은 대화를 통해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뻘에서의 호미질은 말이 쉽지, 30분 넘게 하면 손이 아파오고 허리가 아파온다. 애들도 꾸준히 한다고 해도 1시간 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조개는 안 잡히고 호미질은 점점 하기 싫어져 오니 금방 흥미가 떨어지게 마련. 어촌체험을 상업적으로 하는 마을에서는 그래서 주기적으로 미리 바지락이며 가리비며 동죽을 이곳저곳 '황금어장' 뻘밭에 뿌려 놓고 관광객들을 그리로 유도한다. 그곳에서 조개들은 인간들에게 두 번 잡히는 수모를 겪으면서 외지인들에게는 원시의 본능을 되찾았다는 기쁨, 마을 사람들에게는 소소한 수입을 안정적으로 계속 올릴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주며 어딘가의 페트병, 어딘가의 채집통으로 들어간다. 운 좋은 녀석들은 다시 바다로 가겠지만 운 나쁜 녀석들은 다음 날 해감한 이후 뜨거운 국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오늘 뻘에서 만난 할머니와의 짧은 대화 속에 내가 새삼 느낀 것은 자신의 생업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였다. 관광객들이 헤집어 놓은 뻘밭은 누군가에게는 생업의 현장이자 소중한 삶의 터전일 수도 있는데, 그 할머니는 주변의 시끄러운 외지인들의 호미질 행진에 별 싫은 내색도 안 하시고 조용히 한 자리에서 끊임없이 뻘을 골라내셨다. 굽은 허리, 검게 그을은 얼굴 표정 속에는 자신의 생업에 대한 자신감이 더 크게 느껴졌고, 외지인의 귀찮은 질문도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가 보였다.


간혹 내 좁은 전문 분야에 대해 학생이나 비전문가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이 들어 올 때가 있다. 수업 중이든, 인터뷰에서든, 외부 세미나에서든, 그런 질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간혹 어떤 전문가들은 반복된 질문에 지친 나머지 황급히 자리를 뜨거나 귀찮은 내색을 하기도 하고, 나도 그런 적이 없지 않았는데, 오늘 제부도 갯벌에서 만난 할머니의 모습 속에, 조금 더 내 삶, 연구, 그리고 내가 잘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겠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여유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득바득 살면 조개가 한 소쿠리될 것, 두 세 소쿠리 정도 되긴 하겠지만, 조개를 가지고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될 것도 아닌데 그냥 조금 더 남들에게 조개를 나눠주고, 조개가 잘 나오는 장소도 알려 주고, 조개를 잘 캐는 요령도 알려 주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삶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와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문득 주위를 둘러 보니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 또 다른 뻘을 파내면서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냥 한 군데를 계속 파내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조금만 더 견뎌서 파내어 보라고 방금 배운 교훈을 아이들과 나누고자 했다. 몇 분 후 교훈을 얻은 큰 애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아빠 계속 팠더니 비닐이 나왔어! 그냥 다른 데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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