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석준 Seok Joon Kwon Jun 28. 2022

박물관의 유물

온고지신은 온고지고와는 다르다.

조선이 망한 후 일제 식민지부터 시작하여 6.25 같은 큰 전쟁을 겪으면서 반 세기만에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한국이 다시 반 세기만에 중진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 세대가 지나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몇 개 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제조 입국을 정부 드라이브로 강력하게 실현했다는 것이다. 


이 드라이브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정도까지 대략 한 세대 정도는 굉장히 잘 먹혔다. 주지하다시피 비료 공업부터 섬유, 중화학, 제철, 조선, 자동차, 전자, 반도체, 디스플레이, 그리고 IT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하면서 산업 기틀도 마련하고 지식경제산업으로 전이할 기반도 닦을 수 있었다. 이 한 세대 동안의 드라이브는 여전히 수많은 중진국 이하 국가들이 주기적으로 공무원들을 한국으로 연수 보내면서까지 배우고 싶어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드라이브를 2020년대에도 적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신생아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고 지원하는 것을 넘어, 자식이 가정도 꾸리고 독립하겠다고 하는 시점에서도 계속 간섭하고 부모의 라이프 스타일을 세계관을 철학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전히 한국은 제조업으로부터 GDP의 대다수가 창출되고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으니 제조업이 갖는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과거의 드라이브는 과거의 산물일 뿐이다. 제조업이 중요하다고 해서 정부의 드라이브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전 KIST에서 일할 때 같은 센터에 계시던 선배 박사님께서 KIST 50년사 편찬위원회 활동을 하시며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그 자료를 살펴보면서 문득 깨달은 사실은 KIST의 역사가 곧 한국 제조 입국 드라이브 정책의 역사라는 것이었다. KIST는 한국 최초의 정부 연구소로서, 미국의 도움으로 1966년 설립되어 초반 30여 년 동안은 한국의 제조 입국 드라이브와 그 맥을 정확히 같이 했다. KIST에서 개발된 기술은 화학 비료부터 시작하여 제철, 자동차, 전자,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산업계로 이전되었다. 뿐만 아니라 KIST로부터 ETRI, 기계연, 재료연, 화학연 같은 정부 연구소들이 많이 스핀오프 되어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다. 이들은 다양한 임무를 부여받아 기초과학 연구부터 시작하여 산업 응용 기술 개발까지 폭넓은 기여를 해 오고 있다. 그렇지만 30년 역사를 훌쩍 넘어 반 세기 역사를 기록한 KIST의 고민은 과거의 화려한 영광만큼이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한국, 그 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KIST 같은 연구소가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예전처럼 민간에서 감당할 수 없는 기술을 엘리트 연구자들이 대신 개발하여 이전할 수 있는 분야도 적어졌고 (사실 대부분의 제조업 분야에서는 인력과 자본을 집중할 수 있는 대기업이 훨씬 더 빠르게 더 잘 개발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 연구소로서의 미션 정체성도 한국의 체급이 훨씬 커지면서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KIST는 외부에서 과거의 유산일 뿐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이러한 KIST의 정체성 혹은 나라에 대한 기여 방식 고민은 한국 정부가 해야 할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1970년대-1990년대 정부의 엘리트 관료들이 기함처럼 나라 전체를 이끌어 가며 이 산업 저 산업, 이 지역 저 지역을 훑으면서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어 그야말로 제조업을 일으켰던 과거의 영광이 지금 시대에는 똑같이 재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업은 정부의 '지도' 없이도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아서' 경쟁을 하고 있고, 어떤 분야는 정부의 '관여'가 없어야 더 잘 나갈 수도 있다. 여전히 일부 산업은 정부의 '보호'와 '육성'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 보호와 육성은 예전처럼 정부가 기함으로서 나설 필요가 없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나친 보호와 육성은 무역 갈등 원인이 되기도 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부가 주도한다는 산업 육성 드라이브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정부의 시각은 경제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산업과 개발 위주로 좁혀진다. 교육부는 산업 인재 양성이 주 미션이 되고 과기부는 산업 기술에 필요한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주 미션이 된다. 그렇지만 현재의 한국에 필요한 것은 과거의 산업 육성 드라이브를 걸었던 정부의 리더십이 아닌, 끊임없이 변하는 시장으로 걸어가야 하는 국내 산업에 대한 지원이어야 한다. 교육부는 학생들이 학력, 출신, 지역, 성별, 장애 차별 없이 성장하여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인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원하는 것이 주 미션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과기부는 산업 기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풀뿌리 기초과학과 거대 프로젝트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연구 프로그램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연구와 개발을 구분하고 과학과 기술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KIST는 반 세기 역사를 정리하며 다음 반 세기를 맞기 위해 치열한 고민 끝에 R&R (Role & Responsibility)를 수립한 바 있다. 그 R&R에는 산업 기틀 다지기, 산업 육성, 기술 이전 같은 개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기반 구축, 선제 대응, 후보 발굴 같은 개념이 명시되어 있다. 국가 간 산업 경쟁이 격심해지고 있는 이 시점, 정부가 찾아야 할 R&R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면,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유산은 박물관에 잘 보존하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Back to Basic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